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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32) - 손권

유비 물리친 뒤 추격 자제
魏에 대항 蜀과 연대 탐색


이릉대전과 뒷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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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의 도읍지였던 남경의 밤거리. (南京=권태균 기자)










 
  손권은 육손을 보내 유비가 직접 지휘한 촉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장군들은 여세를 몰아 아예 촉나라까지 쳐들어가자고 했으나 손권은 속히 돌아와 북쪽 전선을 방비토록 지시한다. 전략 감각이 탁월했던 그는 두 나라가 싸우다 지치기를 바라는 위나라의 위협을 잘 알고 있었다.


출처 :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최우석.
포브스 코리아 정기구독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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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를 대비해 손권이 오랫동안 키워 온 인물이 있었다. 바로 육손(陸遜)으로서 손권보다 한 살 아래다. 강동의 명문 집안 출신으로 손권이 집권한 후 정략 차원에서 형 손책의 딸을 시집보내 조카사위로 삼았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뛰어나 손권이 마음먹고 키웠다. 형주 탈환전 때도 여몽을 도와 큰 공을 세웠으나, 역전의 용사들이 많은 오나라 장군 중에선 서열이 높지 않았다. 손권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40세의 젊은 육손을 최고사령관으로 발탁한다. 쉽지 않은 결단이다. 적벽대전 땐 주유를 발탁해 큰 공을 세우게 했고, 형주 탈환전 땐 여몽을 발탁해 숙원을 이뤘다.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CEO 의 가장 큰 일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사람을 잘 알아 알맞게 골라 쓰는 일이야말로 CEO가 할 일이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쓸 생각을 하지 않고 혼자 바쁜 CEO가 많은데 그런 기업은 제대로 클 수가 없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타고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훈련을 쌓으면 어느 정도는 되겠지만 한계가 있다. 근본은 마음가짐이다. 겸손한 마음, 사심 없는 마음을 가져야만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아랫사람을 의심하거나 경쟁하는 마음, 더 나아가 질투하는 마음을 가져선 눈이 흐려진다. 그러면 인사가 공명정대하지 못하게 돼 충신이 멀어지고 간신이 판을 치게 된다. 조직의 몰락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물을 보는 안목에서 손권은 삼국지의 다른 주인공 조조·유비와 마찬가지로 가히 천부적이다. 그런 난세에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어찌 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손권이 확고한 기반을 잡기 전까지는 소수민족의 반란이 잦았다. 육손이 젊었을 때 반란군을 진압하러 간 적이 있었다. 군사들이 모자라자 육손은 주민을 강제 징집했다. 현지 지방장관은 주민들의 피해가 크다고 육손에게 항의하는 한편, 손권에게도 고발장을 보냈다. 그 뒤 육손이 출세해 중요한 자리의 후임을 고르면서 바로 그 지방장관을 추천했다. 손권이 “그 지방장관은 당신을 고발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추천하겠느냐”고 하자 육손은 “저는 현지 토벌대장으로서 병사를 급히 모아야 했고 그 지방장관은 백성을 보호해야 했으니 각기 소임을 다한 것뿐”이라고 답했다 한다. 그 대답을 듣고 손권은 육손이 큰 그릇임을 다시 인식했다.  손권은 육손을 발탁해 힘을 실어 주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중신들이 육손을 추천하게끔 은근히 유도하고 젊은 육손의 위신을 세워 주기 위해 세심한 정지작업을 한다. 우선 육손의 임명식을 성대하게 거행한다. 그 자리에서 손권은 보검을 풀어주며 누구든지 명을 어기면 먼저 참(斬)하고 뒤에 보고하라 명한다. 출정 장수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 준 것이다. 과거 적벽대전이나 형주 탈환전 때도 그랬다. 이런 방식 때문에 출정 장군들이 대공을 세우고 위기 때마다 명장이 잇따라 등장한다.



  기업 오너가 전문경영인을 쓸 때도 이런 방식이 필요하다. 사장에게 일을 맡기고도 안심이 안 돼 의구심을 갖거나 간여하게 되면 사장의 힘이 약해져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일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일단 맡겼으면 믿어야 한다. 오너 중엔 귀가 엷은 사람이 많다. 이들은 측근의 말을 듣고 사장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중간에 개입한다. 이렇게 되면 사장들의 힘이 빠지고 추진력도 떨어진다. 당연히 일도 되지 않는다. 과거 명CEO들은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시간을 두고 기다린다. 그래야 사장들이 자신을 가질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해 유능한 CEO가 자라는 것이다.



  손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도 육손은 전선에서 다소 어려움을 겪는다. 우선 역전의 장군들이 어린 육손을 약간 못 미더워 하는 데다 방어 전략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장군들은 종래 방식대로 유비군과 각개격파 방식으로 싸우기를 원했다. 손권군의 장군 중에는 로열 패밀리나 역전의 장군이 많았다. 이들이 처음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육손은 어떤 땐 군령을 앞세우고, 어떤 땐 몸을 굽혀 그들을 잘 구슬렸다. 뒤에 손권이 장군들의 반항 사실을 알고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육손은 “모두가 오나라의 충성스런 장군들인데 저하고 생각이 다르다 해서 주군께 일러 군신 간 사이를 벌어지게 하겠습니까” 하고 복명했다. 육손은 다른 장군들과는 전략이 달랐다. 지금 유비군의 사기가 높고 기세등등하니 예봉이 꺾이기를 기다려 승기를 잡고 한 번에 주력을 타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대단한 인내가 필요하다. 서전에선 촉나라가 승리를 거뒀다. 장강 입구의 방어전에서 오나라가 패배해 형주의 길목인 효정·이창이 점령당했다. 촉나라 군대는 기세 좋게 장강을 따라 진격했다. 육손은 초기에 맞받아치면 오나라군의 손해가 너무 크다고 보고 전략적 후퇴를 거듭했다. 육손은 촉군의 긴장이 풀어지고 보급선이 길어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동안 장군들이 몇 번이나 결전에 나서자고 했으나 육손은 좀더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보다 조금 앞서 손권의 아우뻘 되는 손환(孫桓) 장군이 촉군과 싸우다 패배해 이도(宜都)성에 포위돼 구원을 요청했다. 장군들은 로열 패밀리인 손환 장군을 빨리 구하자고 했으나 육손은 내버려 두라고 했다. 손환 장군은 평소 군사들이 믿고 따르는 데다 성안에 양식도 많으니 충분히 버틸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를 나눠 그쪽으로 보내면 전체 전선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종합 전략으로 유비군을 섬멸하면 이도성 포위는 저절로 풀린다는 것이 육손의 계산이었다. 육손이 이렇게 신중하게 싸우자 뒤에선 겁쟁이라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육손은 개의치 않고 때를 기다렸다. 장군들이 손권에게 직소하기도 했으나, 손권은 일체 간여하지 않고 육손에게 맡겨 뒀다.



  촉나라 유비도 처음엔 신중히 진군했으나 자꾸 이기자 긴장이 풀렸다. 오나라 장군이 누구냐고 묻고는 무명의 육손이라고 대답하자 “그런 애송이를 나의 상대로 보내다니…” 하고 손권을 욕하기도 했다. 오나라 군대가 자꾸 싸움을 피하자 촉나라 군대도 차츰 지쳐갔다. 병참선이 길어지고 왕성하던 사기도 차츰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여름 더위로 병졸들이 고생하자 유비는 시원한 숲 속에 병영을 세우게 했다. 장강 연안 700리에 걸쳐 40여 채의 촉나라 병영이 늘어선 것이다. 육손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봤다. 전군에 비상을 걸어 병사들에게 화약과 횃불을 나눠 주고 일제히 기습 공격토록 했다. 40채의 병영 중 한 채 건너씩 20여 채에 불을 질렀다. 그동안 긴장이 풀어져 방심했던 촉나라 군사는 대혼란에 빠져 조직적인 저항을 못한다. 앞뒤 연결이 안 돼 우왕좌왕하다 오나라 군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주력도 거의 섬멸됐다. 유비군이 타고 온 배와 보급품은 모두 화염에 휩싸였다. 유비도 허둥지둥 몸만 빠져 일단 마안산(馬鞍山)으로 피했다가 백제성으로 달아났다. 적벽대전 때도 오나라는 화공작전으로 이겼고, 이번 이릉대전도 화공작전으로 성공한 것이다. 유비는 황망하게 쫓겨 가다 불타는 촉 진영을 돌아보고 “내가 어린 육손에게 이런 참패를 당하다니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 하고 한탄했다 한다. 물론 이도성의 포위도 풀렸다. 손환은 육손을 보고 “처음 구원 요청을 외면했을 땐 원망도 했으나 이제 보니 장군의 방식대로 우리를 구원해 줬습니다” 하고 감탄했다. 이릉대전의 승리로 오나라는 위기에서 일단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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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기념관의 육손 상. (赤壁=권태균 기자)


  손권과 육손이 이릉대전에서 승리한 것은 잘 싸운 것도 있지만, 유비의 실책에 힘입은 바 크다. 유비가 애초 명분 없는 싸움을 한 데다가 촉군엔 노련한 장수나 참모가 적었다. 제갈공명은 나라를 비울 수가 없어 참전을 못했고, 뛰어난 전략가 법정(法正)은 이미 작고한 뒤였다. 또 관우와 장비를 잇달아 잃어 믿을 수 있는 장군도 없었다. 유능한 장군 황권이 선봉에 설 테니 뒤에 천천히 오라 해도 유비는 앞장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오나라의 젊은 육손을 너무 경시한 것이다. 만약 법정이 살아서 유비의 참모 노릇을 했거나 제갈공명이 참전했으면 참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손권이나 육손의 운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백전노장 유비를 그토록 완벽하게 속여 깨트린 육손의 전략적 안목과 지휘 능력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또 육손을 대담하게 발탁해 쓴 손권의 안목도 정말 위대한 CEO의 그릇이란 칭송을 들을 만하다.


  손권의 리더십은 전쟁 수습 과정에서 더욱 빛난다. 장군들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아예 촉나라까지 쳐들어가자고 했으나, 손권은 육손의 의견을 물은 후 유비를 더 추격하지 말고 속히 돌아와 북쪽 전선을 방비토록 지시한다. 사실 위문제(魏文帝)는 군사들을 오나라 국경선에 집결시키고 전쟁의 추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촉나라가 서전에서 이겨도 오나라를 완전히 정복할 만한 국력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두 나라가 싸우다가 지치면 그때 위나라가 개입한다는 전략이었다. 유비가 700리에 걸쳐 40여 채의 병영을 숲 속에 세웠다는 보고를 받고 “유비는 전쟁을 모른다. 곧 오나라의 승전 소식이 올 것”이라고 말하고 비상대기를 명령했다. 오나라가 대승했다는 소식이 왔다. 전략가 조조의 아들답게 위문제 조비도 대단한 전략가였다. 그러나 손권이 군대를 재빨리 철수시켜 북쪽 국경선에 집결시켰다는 보고를 듣고는 군사 행동을 멈췄다. 손권이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손권은 이릉대전에서 얻은 전리품을 모두 위문제에게 보내면서 충성을 맹서한다. 비록 이릉대전에서 이겼다고 하나 위나라 대군을 감당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위나라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했다. 손권은 이때 이미 촉나라와 다시 연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패전한 촉나라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손권은 비밀리에 백제성으로 사신을 파견해 관계 개선을 탐색한다. 전승국인 오나라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유비도 오나라 정벌이 무리였음을 깨닫고 사태 수습을 모색하고 있었다. 오나라 사신을 맞은 유비는 태도가 많이 누그러져 자신이 제위(帝位)에 오른 것을 손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신이 한나라 황제를 쫓아낸 조비를 정벌하지 않고 오나라와 싸움을 벌인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하자 유비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한다. 싸움을 한 뒤끝이라 당장 국교 회복까진 가지 않았지만, 두 나라 간에 싸움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이다.


  손권은 촉나라와 막후교섭을 하면서도 위나라에 계속 사신을 보내 충성을 다짐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위나라에선 다소 강압적으로 나왔다. 손권에게 태자를 위나라로 보내라고 강요하고, 어떤 땐 군사들을 동원해 국지전을 일으키기도 했다. 손권은 그때마다 군사를 동원해 적절히 막으면서 외교전도 병행했다. 한 번은 위문제가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세 곳에서 공세를 펴면서 태자만 보내면 당장 군사를 거두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세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 위협했다. 손권이 태자를 인질로 보내느냐 안 보내느냐는 위나라와 오나라의 체면 문제가 돼 버렸다. 위문제로선 다른 제후국(諸侯國)과 부하들에게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받아야 하고, 손권은 오나라가 위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보낼 수 없었다. 일이 다급하게 되면 손권은 태자를 보내겠다고 해 놓고 시간을 끌었다. 어떨 땐 태자를 혼자 보내기가 어려워 오나라의 원로 장소(張昭)를 후견인으로 보낸다고 통고했다.


  위나라에선 장소까지 온다는 바람에 안심하고 있다가 손권에게 다시 당하고 만다. 위나라의 독촉이 심해지자 손권은 태자를 보낼 테니 위나라 황실과 혼사를 맺자고 제의한다. 모두 시간 벌기 작전이었다. 손권의 지연작전에 위문제가 정말 화를 내자 손권은 위나라 황제를 진노케 했으니 오왕(吳王) 자리를 내놓고 식구들만 데리고 교주(交州)로 가서 조용히 살 테니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일종의 역습이었다. 위 황제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손권은 잘 알았다. 손권이 없으면 강동이 혼란에 빠지기 때문에 촉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위나라로선 어떻든 손권을 달래야 했다. 손권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손권은 위나라와의 관계에서 약소국의 슬픔을 톡톡히 맛보았다. 위나라가 강압 외교로 손권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손권은 위나라에 매달리기보다 촉나라와 연합해 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다. 그래서 비밀 교섭을 서둔다. 이 과정이 새어나가 위나라에서 문책 사절이 오자 촉나라 사정을 잘 알고 싶어 정탐차 만난 것뿐이고, 위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고 거듭 다짐한다. 또 손권의 진심을 의심하는 촉나라엔 위나라와의 오랜 관계 때문이라고 안심시킨다. 그래도 유비가 살아 있을 땐 큰 진전이 없었다. 적대관계는 해소됐지만, 동맹관계의 수복은 어려웠다. 오나라에 대한 유비의 원한이 깊은 데다, 오나라에서도 침략 당사자인 유비에 대해 감정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비가 죽고 아들 유선(劉禪)이 즉위하자 촉·오 동맹 회복은 급물살을 탄다. 촉나라의 국정을 장악한 제갈공명이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선 촉·오 동맹 회복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손권을 시험하는 사건이 터진다. 유비가 죽자 위나라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유비가 죽은 공백을 이용해 촉나라를 병탐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같이 촉나라로 쳐들어가 땅을 나줘 갖자고 제의한다. 손권은 신하들의 의견을 묻는다. 많은 신하가 좋은 기회라고 출병에 찬성했다. 그러나 육손은 달랐다. 비록 유비가 죽었다고는 하나 촉나라엔 제갈공명을 비롯한 인재가 많이 남아 있고, 천험(天險)의 방어벽에 싸여 있으므로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좀더 사태를 관망하자는 것이다. 손권 역시 판단이 빨랐다. 위나라 사신에겐 오나라도 출병할 것이나 아직 준비가 덜 됐으니 먼저 출병하면 서둘러 뒤따라가겠다고 말한다. 과연 위나라는 초전부터 고전하다 철수하고 말았다. 사태를 관망하던 손권은 군사를 물리면서 위나라와 관계를 끊고 촉나라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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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 안지 일주일쯤 되었습니다. 글의 등록일자를 조절해서 언제든 내보낼 수 있다는 사실요.!! 비공개로 글을 저장한 후 계속적인 수정을 거친 다음에 내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참 기뻤죠. 그동안 원노트, 오피스 등으로 작성하고 수정을 하다가 밤에 올리는 식이었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편한 기능을 모르고 있었는지 참!! 스스로가 참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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