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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12) - 조조

말년의 총명함 후계구도 완성



조조의 귀중한 유산
 


  삼국지의 세 주인공 조조·유비·손권 가운데 가장 성공한 CEO는 조조라 할 수 있다. 조조가 창업한 위(魏)나라는 영토의 크기·경제력·국가시스템·인적 자원·문화적 수준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앞섰다. 당시 중국 전체를 10이라고 보면 조조의 위나라가 절반이 넘고, 나머지를 유비의 촉(蜀)나라와 손권의 오(吳)나라가 나눠 가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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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기업으로 비유하면 위나라는 창업도 빠르고 외형도 크고 성장성·수익성·안전성 모두 뛰어난 우량 대기업인 셈이다. 기업 조직이 강하고 유연했다. 무엇보다 인적 자원이 풍부하고 질도 높았다. 특히 경영층이 두터웠다. 위나라의 최대 라이벌인 촉나라엔 위대한 전문경영인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있었지만 제한된 인적 자원 때문에 항상 고심한 것과 좋은 대비가 된다.  위나라는 기업 문화도 좋았다. 단지 무장세력 위주의 군사 집단이 아니라 당시로선 문화 수준이 높은 지식기반국가였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였던 식량 문제는 둔전제(屯田制)로, 국방 문제는 병호제(兵戶制)로, 국가세입은 호조제(戶調制)라는 선진 시스템으로 해결했다. 인사도 시스템으로 처리해 나갔다. 창업자 오너인 조조가 30여 년 동안 진두지휘하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조조 자신이 앞장서 변하고 조직을 개혁했다. 새로운 시스템을 끊임없이 만들고 효율적 운용에 앞장섰다. 


  조조가 더 훌륭한 점은 후계 구도를 잘 짜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점이다. 위대한 경영자도 후계 구도에 실패해 기업을 단명에 그치게 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경영자의 평가는 후대까지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본인이 아무리 잘해도 후계 포석을 잘못하면 위대한 창업이 물거품이 된다. 너무 늦게까지 권력을 놓지 않거나 후계자를 잘못 선택하면 그렇게 되기 쉽다. 권력의 승계는 미묘한 문제이므로 드러내놓고 준비하기 어렵다. 창업자들은 권력의 누수를 매우 싫어한다. 섣불리 하면 큰 혼란과 희생자가 생긴다. 


  중국 역사를 보면 황태자 가운데에 역적 음모를 꾸몄다 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이 많다. 순조로운 승계가 되려면 물려주는 권력자가 잘해야 한다. 우선 물려주기 위해 권력을 나눈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준비를 착착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계자를 잘 고른 뒤 잘 훈련시켜야 한다. 


  조조는 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히 후계자를 정해 단련시켜 나갔다. 여러 아들을 경쟁시켜 최종적으로 장자인 조비(曹丕)를 낙점하고 후계 수업을 하도록 했다. 조조가 죽기 9년 전에 조비를 부승상(副丞相) 겸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으로 삼아 후계 구도를 가시화했다. 오관중랑장은 황궁 경호와 상벌을 관장하는 힘 있는 자리였다.  또 파격적으로 조비에게 관서를 설치할 권한을 주어 산하에 많은 인재를 두고 쓸 수 있게 했다. 조조 왕조가 대대손손 계속된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황제의 권한을 차츰 줄이면서 조비가 이어받게 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를 붙여 조비를 뒷받침하게 했다. 조조가 조비에게 남긴 유산 중 가장 값진 것이 좋은 인재 풀이란 평가도 있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촉나라의 유비나 오나라의 손권에 비해 월등했다. 유비나 손권은 후계 구도 마련에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말년에 총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경영자도 말년에 총명을 잃어 엉뚱한 짓을 하거나 기업을 위기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다. 자수성가해 당대에 대기업을 일으킨 창업자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크다. 평생을 세상이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맞서 성공한 사람들이므로 매우 고집스럽다. 성공한 말년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뿐더러 잘못을 충고해 줄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위기가 시작되는데 그나마도 조직과 시스템이 잘돼 있으면 괜찮지만 원맨(One-Man) 경영을 해왔으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영자로 뽑혔던 포드 자동차의 헨리 포드도 말년엔 여러 가지 실수를 했다. 아들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도 권한을 주지 않고 호되게 대하는 바람에 아들이 번민하다 일찍 죽었다. 포드 1세는 정치에 깊이 간여해 히틀러를 찬양하고 유대인을 배척하는가 하면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 말년엔 갱을 동원해 노조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헨리 포드가 망령을 부리니 포드 자동차는 엉망이 되었다.  당시 2차 대전을 치르고 있던 미국은 핵심적 군수 공장인 포드 자동차가 망가지는 것을 볼 수 없어 해군에 복무하고 있던 포드의 손자 헨리 포드 2세를 조기 제대시켜 회사를 정비토록 했다. 포드 2세가 포드 자동차에 돌아와 보니 회사 속사정이 엉망이었다 한다. 조조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의 충고도 잘 듣고 사리에 맞게 판단하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가지 실수를 한다. 그러나 나라가 망할 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큰 전략으론 적벽대전의 실패이다. 만약 가후(賈)의 계략대로 형주(荊州)를 점령한 후 선정을 베풀고 인심을 끌어 모으면서 손권을 달래는 장기 전략을 썼더라면 군사적 대패 없이 강동을 흡수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당시 조조는 강적 원소를 무찌르고 자신만만한 상태였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조조 군사가 손권과 유비 연합군에 왕창 깨진 것이 아니라 북쪽 군사들이 수전(水戰)에 익숙지 않고 당시 전염병이 심하게 돌아 초전 싸움에서 지자 조조 스스로 배를 불태우고 전략적 철수를 했다는 설도 있다. 그 정도에서 깨끗이 물러설 줄 아는 것도 조조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적벽대전에서 패함으로써 조조는 삼국통일에 지장을 받았지만 위나라의 존망에 위협을 받은 것은 아니다. 조조의 두 번째 실책은 한중(漢中) 지방의 장노(張魯)를 정벌하고 나서 그대로 개선한 것이다. 당시 유비는 익주(益州)에 들어가 유장(劉璋)을 쫓아내고 촉나라를 겨우 점령했을 때였다.  이때 조조가 그냥 돌아가려 하자 사마의(司馬懿) 같은 참모가 말린다. 유비가 아직 촉나라의 인심과 기반을 확실히 잡지 못했으므로 내친김에 촉나라에 쳐들어가면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했다. 이때 조조는 오랜 전쟁에 지쳤는지, 험준한 촉나라의 산세에 놀랐는지, 욕심이 지나치면 안 된다며 깨끗이 귀환한다. 물론 조조가 촉나라에 쳐들어갔다 해도 꼭 성공했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때 준비가 덜 된 유비를 깼더라면 위나라의 삼국통일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촉나라 유장의 고관 가운데 장송(張松)이라는 사람이 익주 땅을 바칠 생각을 하고 조조를 찾았으나 잔뜩 푸대접을 받고 유비에게 가버린 사건이 있었다. 조조도 말년이 되니 오만해져 굴러온 떡을 차버린 격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얼마 안 돼 유비가 힘을 길러 한중 쪽으로 나오는 바람에 조조 스스로 방어전에 나서는데 결국 힘에 부쳐 한중을 뺏기고 말았다. 이때도 조조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한중을 깨끗이 내주고 철수한다. 


  진 싸움에 연연하지 않는 전략적 후퇴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조조의 훌륭한 점이다. 진 싸움을 오판하거나 체면 때문에 질질 끌려 들어가기 쉬운데 조조는 그때마다 정확한 판단과 결단을 보여 준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안 될 사업은 빨리 단념해야 하는데 그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망해가는 사업에 미련을 갖거나 결연하게 정리를 못해 기업 본체가 기울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대우그룹이 대표적인데 외환위기 후 세상이 변한 걸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야말로 천지개벽하듯 바뀌었는데 여전히 옛날식으로 빚으로 덩치를 키워갔다. 그리고 정부와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아 유지하려 했다. 만약 그때 상황을 일찍 파악하고 자동차 등 핵심기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정비했더라면 대우그룹이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당시 대우의 재무구조는 매우 나빴지만, 국제적 인맥이나 좋은 인재·브랜드 가치·풍부한 경험 등 무형재산이 많았다.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조조의 큰 장점이다. CEO라면 반드시 배우고 갖춰야 할 점이다. 이러한 능력은 오랜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조는 전투를 몸소 지휘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다. 조조는 유명한 병법가 손자(孫子)의 책을 독파해 그 해설서를 펴내고 그것을 부하들이 읽게 했다.  조조는 또 유명한 시인이었다. 조조가 원소의 잔당을 소탕하러 멀리 북쪽 오환(烏桓) 지방에 갔을 때, 적벽대전 때, 또 마초를 치러 서량(西凉) 지방에 갔을 때 지은 시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기개가 높으면서 서정성이 풍부하고 인간성이 돋보이는 내용이라 한다. 유비나 손권이 시를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조조는 시를 통해 주위의 공감을 얻어내기도 하고 당대의 지식인 명사들과 당당히 문화적 교류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의 이런 시인적 기질은 발상의 자유분방함과 소프트적인 유연성으로 연결되지 않았나 싶다. 확실히 조조의 위나라는 하드적인 면뿐 아니라 소프트적인 면에서도 강했다. 그것이 후에 삼국통일의 에너지가 됐을 것이다. 



  조조도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었는지 말년엔 심신이 약해진다. 그래서 두통에 시달리고 헛것도 보면서 자주 몸져눕는다. 30여 년 동안 천하를 누비며 동분서주했고 독한 짓도 많이 했기 때문인지 악몽도 많이 꾼다. 그래서 신하들이 용한 도사를 불러 제사를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한 즉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했다. 이제까지 없던 일이 일어나는 걸 보아 내 천명이 다 된 듯싶다. 그냥 내버려 두라”며 듣지 않는다. 역시 조조다운 기개요, 발상이다.  조조는 병이 깊어 다시 일어날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 우선 조홍(曹洪)·사마의 ·가후·진군(陳群) 등 중신들을 병상에 부른다. “내가 아무래도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특히 그대들에게 집안일을 부탁하니 잘 해주기 바란다. 나의 맏아들 앙(昻)은 유씨의 소생이나 일찍 전장에서 죽고 이제 내 아들은 변씨에게 태어난 비(丕)·창(彰)·식(植)·웅(熊)뿐이다. 그 가운데 평생 식을 사랑했으나 술을 좋아하고 성질이 허황해 세자로 세우지 않았다. 창은 용맹스러우나 꾀가 모자라고 웅은 너무 몸이 약하다. 장자인 비가 관후하고 성실해 백성을 아낄 것이니 내 뒤를 이을 만하다. 그대들은 그를 잘 도와 큰일을 이루게 하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매우 잘된 선택이었다. 조비는 정치력과 결단력을 갖춘 데다 문화적 교양도 있어 물려받은 위나라를 잘 승계, 발전시켰다. 조조는 죽음에 즈음해 “지금은 비상시국이니 내가 죽은 후 일선 장수들은 임지를 떠나지 말고 맡은 직분을 충실히 지키라. 또 나의 장례도 화려하게 하지 말고 검소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또 비축해 두었던 좋은 향을 가져오게 해 자신을 섬기던 여인들에게 나눠 주며 “내가 죽은 뒤에 너희는 부지런히 바느질을 배워 길쌈을 많이 하고, 비단 신발 같은 것을 만들어 팔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세심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조조는 죽음에 임해서도 마무리를 깨끗이 하고 간 것이다. 참으로 당대 제일의 영웅의 모습이다.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후계자를 위한 준비에 있어, 또 아랫사람에 대한 인간적 배려에 있어 위대한 CEO의 표상을 보여 준 것이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조조는 싸움에 임해서도 서두름이 없었으나 변화무쌍해 기회를 놓침이 없고, 재주 있는 자를 발탁해 일을 맡겼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한 계산에 따랐으며 재능이 있으면 사소한 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조가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릇이 크고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조조는 비범한 인물로서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종합평가했다.



출처 :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이미지 : 포브스 코리아 심층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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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데 나른하기만 합니다.
드디어 삼국지 경영학 조조편이 끝났습니다. 키보드에 불나겠습니다.
일일이 옮겨적기 힘듧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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