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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33) - 손권

손권, 다시 위나라와 싸우다

탁월한 용병술로 魏 격퇴…
즉위 18년 만에 황제 등극


 손권은 사람을 잘 알아봤다. 손권에게 발탁된 인물은 마치 신들린 듯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서성(徐盛)도 그런 인물이다. 그는 위나라 문제가 직접 대규모 정벌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해 왔을 때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과연 그는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위나라를 물리친 뒤 손권과 오나라는 절정기를 맞이한다.

 손권은 촉나라와의 국교 재개를 조심성 있게 진전시킨다. 강력하고 오만한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촉나라란 우군이 필요했다. 유선이 즉위해 2세 체제에 들어간 촉나라도 국내 안정과 숙원의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 오나라와 손을 잡아야 했다. 마침 촉나라 남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도 오나라와의 우호관계가 시급했다. 승상 공명이 국교 재개를 주도한다. 전쟁을 한 뒤끝이라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공명은 오랜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먼저 심복인 등지(鄧芝)를 오나라에 보내면서 이번 일이 나라의 긴급대사임을 신신당부한다. 등지가 손권을 만나 촉·오 전쟁에 대한 유감을 표하고 국교 재개에 대한 촉나라의 희망을 전한다. 손권은 “원칙적으로 동의하나 촉나라 2세 황제가 아직 연소한데 과연 믿고 일을 진전시킬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나타낸다.

 등지는 2세 황제는 영민하며 무엇보다 승상 공명이 잘 보좌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손권은 유선보다 공명을 더 믿었는지 모른다. 위나라의 강압적 요구에 자존심이 상해 있던 손권은 결심을 하고 장온(張溫)을 답례 사절로 촉나라에 파견한다. 장온은 성도에서 유선과 공명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2세 정권의 안정을 확인한다. 공명은 장온이 돌아갈 때 등지를 동행시켜 국교 정상화의 마지막 마무리를 지었다. 이때 촉나라 유선은 황제가 돼 있었고 손권은 오나라 왕이었기 때문에 두 정상의 의전 절차에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손권은 형식과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실질적으로 문제를 풀었다. 평등한 조건으로 불가침 조약과 공수동맹을 맺은 것이다. 국교 재개 과정에서 손권은 촉나라의 사신 등지를 매우 좋아하게 됐다. 외교 감각이 뛰어난 손권은 등지가 매우 유능한 외교관임을 바로 알아보고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기도 했다. 손권이 등지에게 오·촉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위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천하를 나눠 다스리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때 등지는 하늘에 해가 두 개가 없듯이 천하의 주인도 두 사람이 될 수 없으므로 그때는 촉나라와 오나라가 마지막 결전을 벌여 이긴 쪽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답한다. 따라서 촉·오 두 나라의 군주가 부지런히 덕을 쌓아 천하의 인심을 얻고 신하들은 충성과 지혜를 다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손권은 웃으면서 “정말 솔직한 말을 해줬다”면서 더욱 등지를 신임했다 한다. 손권은 촉나라 공명에게 “흔히 사신들이 꿀 같은 언사로 외교를 하려 하는데 등지는 오직 진실과 성의로 대하니 정말 믿을 만한 인물”이라는 서신을 보낸다. 그 뒤부터 등지는 촉·오 사이를 오가면서 외교적 난제를 잘 해결하곤 했다.

이렇듯 손권은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잘 만들었다. 그래서 손권이 주재하는 회의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토론이 이뤄졌다 한다. 위나라는 조조 이래 강력한 카리스마가 지배해 위에서 회의를 끌고 가는 식이었고, 촉나라는 근엄한 성격의 제갈공명 때문에 회의가 다소 딱딱했다 한다. 그러나 손권은 신하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어 떠드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 결론을 내는 방식을 취했다. CEO로서 매우 현명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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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가 회의를 주도하려면 조조처럼 발군의 선견력과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도 못하면서 회의를 주도하면 회의는 지루하고 비생산적인 것이 된다. 밑으로부터의 좋은 의견이 올라오지 않게 된다. CEO의 식견이 낮을 땐 더욱 그렇게 된다. 공개된 회의에서 CEO가 자신만만하게 떠드는데 다른 의견을 내기는 무척 어렵다. 한걸음 더 나가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저희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착안하십니다” 하고 아첨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동맥경화가 심화돼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조직이 신선하고 활기에 넘칠수록 회의도 활발하다. 그야말로 계급을 떠나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대안을 내놓는 분위기가 될수록 조직도 에너지가 넘친다. CEO의 장기 집권의 폐해도 회의에서 나타난다. 경험이 많고 아는 것도 많기 때문에 밑의 의견이 시원치 않게 들리고 따라서 참고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대로 회의를 몰아가다 도중에 “내 말 맞지. 틀렸으면 솔직히 이야기 해봐”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다른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 아무도 반론을 못하지 않나”하면서 다시 장광설을 펼친다. 이쯤 되면 회의가 아니라 독연장(獨演場)이 되는 것이다.


 손권은 아랫사람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오나라엔 충언을 하는 신하들이 많이 배출된다.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자란 손권은 욱하고 거침없는 성질이 있었다. 그것을 장소나 장굉 같은 원로가 잘 견제하며 모를 다듬었다. 손권도 속으로는 화를 많이 냈지만, 오나라를 짊어진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아 애써 참고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손권은 신하와 술을 먹을 때도 상하 없이 질탕하게 마시곤 했다. 한번은 궁중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할 때였다. 손권이 돌아가며 술잔을 권하는데 한 신하가 술이 취한 체하고 엎드려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 신하는 언행이 근엄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연회와 사냥을 즐기는 손권에 대해 거침없는 충언을 하곤 했다. 그래서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손권이 그 앞을 떠나자 얼른 일어나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을 보게 된 손권은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아 그 신하에게 호통을 치며 칼을 빼들었다.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놀라 손권을 부여잡고는 “저 친구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전하가 술김에 저명한 학자를 죽였다는 소문이 나면 전하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렸다. 손권은 “조조도 고명한 공융(孔融)을 죽였는데 난들 왜 못 죽이겠느냐”며 고함을 쳤다. 신하들은 “그래서 조조를 폭군(暴君)이라고 하는 것인데 주군이 그걸 닮으려 하십니까”하니 손권은 칼을 놓으면서 “내가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앞으로 내가 석 잔 이상 술을 마시고 내린 명령은 시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신하는 나중에 여몽이 관우를 속여 형주를 기습할 때 큰 공을 세우게 된다.

 한번은 큰 배가 건조돼 손권이 시승을 하게 됐다. 손권이 배를 타고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손권은 배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먼 항구로 가보자고 한다. 그러나 옆에 있던 측근은 위험하니 멀리 안가는 게 좋겠다고 건의한다. 그러나 손권은 듣지 않고 선장에게 멀리 가자고 명령했다. 그러자 한 측근이 칼을 빼 선장을 겨누고 가까운 항구에 배를 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배를 대자마자 파도가 크게 일며 배가 요동을 쳤다. 손권 일행은 허둥지둥 배에서 내렸는데 그제야 그 측근은 손권 앞에 무릎을 꿇고 명령 불복종에 대한 죄를 청했다. 손권은 웃으면서 “물이 그렇게도 무섭더냐”며 웃고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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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 감로사에 있는 그림. 유비가 손권의 누이와 결혼하기 위해 찾아와 인사하고 있다.

 손권이 촉나라와 손을 잡자 위문제가 크게 화를 내면서 대규모 정벌군을 이끌고 직접 쳐내려 왔다. 이번엔 동부 전선으로 광릉(廣陵), 즉 남경 바로 위를 노렸다. 오나라는 즉시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때 중론은 육손이 아니면 그 공세를 막기 어려우니 육손을 부르자는 것이었다. 그때 육손은 형주 방면에 주둔하면서 촉나라와 위나라를 동시에 견제하고 있었다.
 워낙 중요한 자리라 육손을 함부로 빼낼 수 없었다. 손권은 깊이 생각한 끝에 서성(徐盛)을 발탁했다. 서성은 매우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용감한 장군이었다. 과연 서성은 위문제의 대군을 장강과 수군을 이용해 훌륭하게 막아냈다. 위문제는 이렇게 장강이 막혔으니 강동 땅은 영원히 넘볼 수 없는 것인가 한탄하고 군사를 물렸다 한다. 장강이란 천험의 방어벽도 있었지만 손권이 서성을 발탁한 것이 결정적 승인이었다. 손권은 사람을 잘 볼 뿐 아니라 일단 발탁하면 그 사람은 마치 신들린 듯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 손권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손권은 서성을 전선으로 보낼 때 “장군이 이번 중책을 맡았으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소”하며 집안 조카인 손소(孫韶)를 부장으로 딸려 보냈다. 손씨 집안엔 유능하고 용감한 장군들이 많았다. 이들이 왕실의 울타리가 돼 주었는데 전혀 의지할 만한 측근들이 없었던 촉나라 유선에 비해 행운이었다. 손소도 담력과 용기가 대단했다. 원래 유씨였는데 죽은 손책이 매우 사랑해 손씨 성을 주고 양아들로 삼았다. 손소는 작전 계획을 둘러싸고 사령관 서성과 의견이 달랐다. 자기가 이곳 지리를 잘 아니 바로 기습공격하자는 것이고 서성은 준비를 한 다음 총공격을 하자고 말렸다. 처음엔 달래다가 계속 뻗대자 서성이 “이건 사령관의 명령”이라고 했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자 서성은 “내가 너를 제어하지 못하면 다른 장군들을 어떻게 다스리겠느냐”하며 군법으로 손소를 처형토록 명령을 내렸다. 주위 장군들이 놀라 급히 손권에게 달려갔다. 손권이 허둥지둥 달려와 서성에게 “손소가 혈기만 믿고 큰 잘못을 범했으나 나를 봐서 한 번만 용서해 줄 수 없느냐”고 청했다. 서성은 전쟁터에서 군법이 허술하면 어떻게 싸우느냐면서 처형으로 시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손권은 “장군의 말이 백번 옳으나 손소는 돌아가신 손책 형님이 특히 아끼던 아이라 그를 죽게 하면 다음에 지하에서 형님을 뵐 면목이 없어서 그런다”고 말한다. 이쯤 되자 서성도 “주군의 체면을 봐 형 집행을 미루겠습니다” 하고 물러섰다. 이렇듯 손권은 사령관의 면목을 살려주면서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 뒤 서성은 높은 사기와 빈틈없는 전략으로 방위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손소도 적을 기습공격해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손권은 촉나라와의 공수동맹 덕을 톡톡히 보았다. 조비가 대군을 거느리고 동부전선으로 쳐들어 왔을 때 촉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중(漢中) 쪽에서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촉나라가 한중 쪽에 군사를 내자 위나라는 매우 놀라 오나라에서 철수했다. 그 뒤부턴 촉나라가 한중 쪽에 위협을 받으면 오나라에서 합비 쪽에 군사를 내 연계작전으로 강력한 위나라를 견제했다.

공명이 후주(後主)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를 바치고 북벌을 감행할 때도 오나라는 공명의 부탁을 받고 합비 쪽에 군사를 내어 양동작전을 폈다. 조비는 몇 차례 오나라를 침공했으나 손권의 끈질긴 방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40세의 젊은 나이로 낙양에서 병사하고 만다. 그 뒤를 아들 조예(曹睿)가 잇는데 바로 명제(明帝)다. 손권은 어린 명제가 취임하자 몇 차례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조조의 손자인 위명제도 매우 총명한데다가 위나라엔 역전의 용사들이 많았다. 노련한 육손은 이때 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에 반대했다. 세금을 줄이고 내치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나라의 공세를 몇 차례나 잘 막아낸 손권은 자신이 붙은 데다 성급하게 공을 세우고 싶은 장군들이 자꾸 손권을 부추겼다.

 그러나 오나라의 전력은 위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넓힐 정도는 안 됐다. 그래서 손권도 전쟁을 당분간 접고 내치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다. 오나라는 땅이 비옥하고 물이 많아 논농사가 잘됐다. 손권은 농업과 축산을 장려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조선·광산업에도 힘을 쏟았다. 조선은 장강 방위에 필요한 강력한 수군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업과 수송망 정비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광산 개발을 통해서는 무기와 일용품에 필요한 철과 금속을 만들었다. 당시는 매우 중요한 소금 생산에도 힘을 쏟았다. 이렇게 오나라 상하가 합심해 노력하자 나라도 태평하고 국력이 충실해졌다. 마침 장강에 황룡이 나타나고 무창(武昌)에 봉황이 깃드는 등 전국 각지에서 여러 길조가 나타나자 손권을 황제로 추대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손권은 처음 몇 번은 사양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지금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있는 위·오·촉 세 나라 중 오나라만 왕으로 있는 것은 균형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손권은 못이기는 체 승낙하고 황제 자리에 오른다. 손권이 오나라를 물려받아 군주 노릇을 한지 18년 만이다.

손권의 황제 등극에 대해 적대국인 위나라는 말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동맹국인 촉나라에서는 말이 많았다. 한나라의 정통은 어디까지나 촉한인데 손권이 황제가 되면 대의명분에 맞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성급한 국교단절론까지 나왔다. 그러나 냉철한 공명은 국제 정세의 현실을 잘 파악하라면서 신하들을 달래 오나라에 축하 사절을 보낸다. 결국 한 시대에 세 사람의 황제가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가 손권의 나이 47세로서 촉나라 황제 유선보다 25세, 위나라 명제 조예보다 23세 위였다. 그동안 손권은 서두르지 않고 여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린 것이다. 이때가 손권의 절정기다.

 손권은 황제 등극식에서 주유 장군이 없었으면 내가 이 자리에 결코 오를 수 없었을 거라며 그 공을 높이 기렸다. 그 다음 노숙 장군이 처음 자기를 만났을 때 패업의 길을 알려줬다며 극구 칭찬했다. 그때 대원로 장소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적벽대전 때 당신의 말을 들어 항복했다면 지금쯤 어찌 됐을 것 같소” 하고 은근히 면박을 주었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온 대원로 장소에 대한 오래된 유감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평소엔 꾹 참고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 손권의 장점이었다. 손권이 황제가 되자 점 잘 치는 신하를 불러 “내가 얼마나 황제 노릇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신하는 여러 가지로 짚어보고는 “한고조 유방은 왕조를 창건해 12년 재위했는데 폐하는 그 두 배를 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손권이 기뻐하며 “오나라는 얼마나 갈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 신하는 한참 헤아려 보고는 “다가오는 경자(庚子)년이 위험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경자년이 언제냐고 물은 즉 지금부터 58년 뒤가 된다고 답했다. 손권은 “지금 문제만 해도 골치 아픈데 58년 뒤의 일을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 그것은 내 후손들이 걱정할 일”이라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먼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그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출처 : 포브스 정기구독 중 발췌
前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최우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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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부분은 오랜만에 옮겨 적네요.!! 사실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부분은 조조편이었습니다. 만기총람형의 CEO 조조와 자애로운 CEO 유비, 그리고 수성형의 CEO 손권이 펼치는 삼국지 경영학은 정말 흥미진진해서 부록으로는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이게 얼마 전 책으로도 나왔지요. 못 보신 분들도 있고 해서 옮겨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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