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경영학 (18) - 유비 :: 2007. 5. 18. 19:50

삼고초려의 정성


높은 뜻과 열성에 ‘臥龍’도 감동

평생을 지극한 충성으로 보답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공명을 맞아들인 것은 유비가 평생 한 일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공명이 참가한 후 유비 진영은 전략과 시스템을 갖추고 천하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그 전의 유비 진영은 뜻만 높을 뿐 의리로 뭉친 임협집단에 가까웠다. 친척들로만 구성된 시골 영세기업이 대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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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의 제갈공명 영입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카우트이기도 하다.  CEO가 성공하려면 2인자를 잘 만나야 한다. 훌륭하면서도 1인자가 될 욕심이 없는 2인자를 맞아 잘 쓰는 것은 위대한 CEO의 안목이며 통이다. 삼국지 시대엔 위나라 조조의 순욱(荀彧)이나 오나라 손권의 노숙(魯肅)이 비슷한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제갈공명이 단연 뛰어나다.  유비와 제갈공명은 공식적으론 군신(君臣) 관계지만 실질적으론 같은 이념을 가진 동지요, 가족이며 공동운명체라 할 수 있다. 둘은 맨주먹으로 촉나라를 세운 창업 동지다. 대개 창업 동지도 나중엔 안 좋게 헤어지기 쉬운데 둘은 끝까지 아름답게 갔다. 유비의 삼고초려가 그토록 빛나는 것은 좋은 사람을 모시기 위한 유비의 지극한 정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좋은 사람을 끌어올 땐 이 정도의 정성을 들여야 하고, 아랫사람이 좋은 주인을 정하려면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해 준다. 삼고초려 이야기는 사실과는 약간 다르다는 주장도 있으나 오랜 세월 사람들의 머리에서 생각해낸 인재 영입의 이상적 모델이라 보면 될 것이다. 삼고초려는 가장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이상과 뜻이 맞아야 하고 서로의 전략과 인간성에 신뢰를 가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절차에 있어서도 정성과 예의를 다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유비가 공명을 찾아 갔을 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 얹혀 지낼 때였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하나 근거지도 없고 힘도 없었다. 유비 자신 이미 47세의 장년에 달했는데 뜻만 높을 뿐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어 몹시 초조할 때였다.



  이때 유비는 형주 명사 사마휘(司馬徽)를 만난다. 사마휘는 형주 지식인들의 대부(代父) 같은 존재로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비가 자기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하자 사마휘가 묻는다.

"왜 그렇게 고달픈 줄 아십니까",

"제가 박복해서 그렇지요",

"그게 아닙니다. 수하에 좋은 사람이 없어 그렇습니다"

"제 밑에도
인재들이 많습니다. 무장으론 관우 ·장비 ·조운이 있고 참모로는 손건,미축,간옹 등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경영할 만한 전략을 짜고 그 큰일
을 만들어 갈 만한 큰 인재가 없습니다. 관우, 조운은 1만 명을 대적할 수 있는 명장이나 그들을 부릴 만한 사람이 없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건, 미축, 간옹 등은 충직하지만 심부름꾼 정도입니다."


  유비는 사마휘에게 자기 진영에 참여해 도와 달라고 한다. 사마휘는 자기는 그럴 재목이 못된다고 하면서 와룡(臥龍)이나 봉추(鳳雛) 중 어느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형주엔 전란을 피해 온 지식인 명사들이 많았다. 공명도 북쪽 산동성 낭야(琅邪) 사람으로 어릴 때 형주로 와서 양양(襄陽) 부근 융중(隆中)에서 농사를 지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준재로서 명성이 높아 젊은 지식인 사회의 대표주자 격이었다. 공부를 위한 공부만 한 게 아니고 국가경영과 치세에 관한 실용적 공부를 많이 했다. 언젠가는 좋은 주인을 만나 천하 사람들을 위해 뜻을 펴 보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엎드려 있는 용 즉, 와룡(臥龍) 혹은 복룡(伏龍)이라 불렸던 것이다. 



  공명은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하곤 했다. 두 사람 다 좋은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융성케 한 사람들이다. 관중은 재상이고 악의는 장군인데, 공명도 전장에 나가면 장군이 되고 돌아오면 재상이 되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공명창업하거나 왕이 되기보다 좋은 군주를 보좌해 뜻을 펴려는 힘 있는 전문경영인의 길을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이다. 공명은 처가가 형주에서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유비에겐 더할 나위 없이 탐나는 인물이었다. 유비가 형주 지식인들을 끌어들이고 널리 인심을 얻는 덴 가장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유비는 서서(徐庶)라는 인물을 만난다. 서서는 공명과 벗하던 인물로 유비의 대의명분과 인품에 반해 한동안 유비 밑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가 조조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유비 밑을 떠나게 된다. 이때 서서가 공명을 다시 추천한다. 유비는 사마휘에게 공명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 번 데려오라고 말한다. 서서는 공명천하의 인재로서 데려올 게 아니라 유비 자신이 모시러 가는 것이 예의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유비는 공명을 찾아갈 결심을 한다. 아무리 공명이 탐나도 유비의 지위에서 자신보다 20세나 어린 백면서생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세 번씩이나 찾아간다. 그런 유비의 겸허함과 정성이 공명을 움직였는지 모른다. 공명이 은거하고 있던 융중은 당시 형주의 수도 양양에선 한 30리 거리지만 당시 유비가 살고 있던 신야(新野)에선 200리 거리다. 겨울 눈보라 속에 찾아갔다가 허행을 하자 봄철에 다시 찾아간 것이다. 같이 갔던 관우와 장비는 불평이 많았지만 유비는 좋은 사람을 모시려는 나의 정성을 보이는 것이라 말하고 묵묵히 길을 재촉한다.런 정성만으로도 공명은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공명으로선 마음속으로 작정을 해 놓고 유비의 정성을 시험해 보았는지 모른다. 어차피 유비 진영으로 가려면 그 정도의 예우는 받고 나가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을 모시는 덴 절차가 중요하다. 그런 대접을 받고 갔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세상에 권위도 서고 말발도 먹히기 때문이다. 또 모시는 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새 사장을 임명하고 나서 "내가 사장 방 좀 구
경하러 왔다." 면서 직접 찾아가곤 했다. 이 회장이 직접 가면 온 회사가 바짝 긴장하게 된다. 임원들을 모아놓고  "내가 알아보니 새 사장이 가장 유능하다 하더라. 그래서 이번에 특별히 보낸기라. 새 사장 말이 내 말이니까 잘 듣고 한 번 해 봐라. 나도 이제 안심했다" 하고 새 사장을 한껏 추켜세우곤 했다. 젊은 사장을 보내거나 파격적 인사를 할 땐 더 대단하게 챙겼다. 이 회장이 그 정도로 하면 새 사장의 권위는 하늘로 올라가고 힘이 붙는다. 명령도 척척 먹힌다. 분위기가 확 바뀌어 일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는 것이다.



세 번째에야 공명을 만난 유비는 자기의 꿈과 포부를 말하고 자기를 좀 도와 줄 것을 간곡하게 청한다. 유비는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한나라 왕실은 기울어져 조조가 전횡을 부리고 있지만 말릴 힘이 없습니다. 한실 후손인 저는 한실 부흥을 도모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니 선생의 좋은 재주를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유비의 정성에 감복한 공명은 자기 나름의 시국관과 전략을 이야기한다.   "지금 천하가 어지러우나 차츰 질서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북쪽은 조조가 강적 원소를 깨고 확고하게 터전을 잡아 잘하고 있으니 당분간 그 세력을 꺾기 어렵습니다. 동쪽 강동(江東) 지방은 이미 손권이 삼대에 걸쳐 기반을 닦고 장강(長江)의 천험(天險)에 의지해 웅거하고 있으니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형주 지방은 천하의 배꼽에 해당하는 요지이지만, 형주목 유표는 나이가 많고 패기가 없어 자기 땅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옆에 붙어 있는 익주(益州) 지방도 옥야천리(沃野千里) 좋은 땅이나 지금의 주인 유장(劉璋)은 그 땅을 간직할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먼저 형주를 차지한 다음 익주를 병탐해 북쪽의 위나라, 동쪽의 오나라와 솥발 같은 3각의 형세를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어 위나라와 대항하면서 차츰 힘을 키워 장차 천하를 통일하는 전략을 써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유명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다.



  이제까지 눈앞의 일에만 매달리다가 이런 원대한 전략을 한 번 듣고 나니 유비는 눈앞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유비는 몇 번이나 탁월한 안목이고 전략이라고 감탄한다. 두 사람의 뜻과 이상, 전략이 같음을 확인한 것이다. 유비는 공명에게 같이 가서 그 천하 경영의 실행을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공명은 처음엔 세상으로 내려갈 생각이 없다고 사양한다.  이때 유비는 다시 예의 눈물을 흘린다. 선생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유비가 어떻게 천하전략을 펴 보며 불쌍한 백성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통곡까지 한다. 공명은 마음이 흔들려 유비와 같이 갈 생각을 한다. 그날 밤 유비는 초려에서 묵으며 공명과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다음날 같이 신야로 간다. 드디어 유비는 공명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정말 큰일을 한 것이다. 위대한 경영자는 자기 스스로 바쁘게 일하는 게 아니라 좋은 사람을 찾아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걸 모르고 혼자 동분서주하면서 회장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기업이 잘 되지 않느냐고 탄식하는 오너들이 얼마나 많은가.



 
공명은 초려를 떠나면서 "내가 유장군의 간곡한 말씀을 저버릴 수가 없어 같이 가기로 했다. 내가 공을 세우고 난 다음엔 다시 융중으로 올 것이니 그때까지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 고 동생 제갈균(諸葛均)에게 당부한다. 공명으로선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한 다음엔 돌아오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명은 그 길로 유비를 따라가 54세에 오장원(五丈原) 전장에서 장렬히 병사하기까지 유비는 물론 그 2세에까지 충성을 다한다. 공명 없는 유비 황제나 촉나라는 생각할 수가 없다. 유비로선 공명을 처음 모실 때 삼고초려의 수고를 했지만 그 수고는 크게 보답받은 것이다. 공명은 왜 유비를 택했을까. 유비의 대의명분과 간곡한 정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형주의 유표에겐 실망한 뒤고, 남은 것은 조조와 손권인데 조조와는 아무래도 궁합이 맞지 않았다. 조조 스스로 총명하고 치밀하여 공명이 자유롭게 재주를 펼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조조 밑엔 이미 많은 인재들이 있어 공명이 들어갈 공간이 별로 없다. 또 공명은 근엄하고 성실한 성격인데 조조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패도(覇道)와 기계(奇計)에 능하다. 조조는 한나라 승상으로서 한실을 받들고 있으나 언젠가는 한실을 폐하고 자기 왕국을 세우리라는 것을 지혜로운 공명은 예상했는지 모른다.




 
손권은 지역적으로 강동을 기반으로 한 수성형 CEO여서 공명의 천하경영엔 아무래도 미흡하다. 또 하나 걸리는 것은 공명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이 이미 손권의 참모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명은 한실 부흥을 내세우는 유비가 대의에도 맞고, 무엇보다도 유비의 성실한 인품과 관대함에 끌렸을 것이다. 유비라면 통이 커서 폭넓은 재량권을 줄 것이니 한 번 마음껏 뜻과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공명은 결국 사람과 가능성을 보고 별 볼일 없던 유비를 선택한 셈인데, 당시로선 대단한 결단이다.  공명은 세속적 가치보다 일할 보람과 장래에 투자한 것이다. 대기업의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영세 벤처기업에 가서 한 번 같이 키워보자는 심정에 비유해 볼 수 있다. 공명도 물론 어려움이 많으리라는 것은 짐작했을 것이다. 이미 확고한 터전을 잡은 조조나 손권의 세력에 대항해 새 터전을 일으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현명한 공명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되고 안 되고는 하늘의 뜻이고, 한번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이 공명의 심경이고 의기였는지 모른다.  뒤에 사마휘가 공명이 유비에게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공명이 좋은 주인을 얻었으나 때를 얻지 못해 애석하도다”하며 하늘을 보고 탄식했다 한다.




 
중국에선 공명의 인기가 매우 높다. 싸움터에서의 신출귀몰한 재주와 탁월한 전략, 공평무사한 집무태도도 그렇지만 그 위에 당장의 이해를 초월한 그 같은 선택과 애끓는 충성심, 장렬한 죽음 등이 공명의 인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그래서 공명이 유비를 만나기 전에 살았다는 와룡강(臥龍岡)은 신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장소를 둘러싸고 오래전부터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하남(河南)성의 남양(南陽)과 호북(湖北)성의 고융중(古隆中)이 대표적인데, 둘 다 청나라 때부터 서로 자기 고장이 삼고초려처임을 주장하고 있다. 양쪽 다 넓은 대지 위에 고색창연한 건물과 유적들을 웅장하게 지어놓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공명이 살던 초가집(草廬), 유비와 공명이 만난 방, 옆에서 기다리던 관우와 장비의 조각상, 공명이 독서하던 방, 천문을 보았다는 관측대, 무릎을 안고 생각에 잠겼다는 바위 등이 그대로 있다. 양쪽 다  "유비가 공명을 세 번이나 찾은 곳"이라는 커다란 비석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또 많은 정치인, 문인들이 찾아와 공명을 기리고 칭송한 시비(詩碑)가 총총히 서있다. 아주 희귀한 것으로 공명부인의 천연색 초상화도 있다.



 
전설과는 달리 매우 품위 있고 잘 생긴 얼굴이다. 형주 명사 황승언(黃承彦)의 딸로 박색이었지만 매우 현숙하고 내조를 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명이 그토록 분주하게, 또 훌륭히 나랏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신경쓰지 않게 해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명 부인 초상 위의 현판도 ‘지혜현숙(智慧賢淑)’이라 쓰여 있다.



삼고초려처에 대한 정통 시비는 워낙 민감한 사항이라 중국 정부도 지역감정을 고려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오랜 고증 작업을 거쳐 학술적으론 융중 쪽이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이 났으나 정치적 고려와 관광상의 이유 때문에 명백히 발표는 안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남양 편을 드는 학자들도 많으며 남양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공명의 인기가 워낙 높기 때문에 그런 시비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관광객이 많이 몰려들고 있다. 



출처 :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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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니 이런 날은 술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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