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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27) - 손권

적벽대전의 승리와 전후 처리

賞은 후하고 罰은 신중히 손위 신하들 신뢰로 포용
적벽대전의 승리와 전후 처리.
 

  손권은 부하의 장점을 주로 보고 단점은 적게 보려 했다. 신하가 잘한 것은 많이 칭찬했지만 불만스럽거나 섭섭한 것은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 적벽대전 때 항전을 주장해 승리로 이끈 주유 등을 크게 포상하면서도 항복을 주장했던 장소를 내치지 않는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래서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가 손권으로부터 신뢰받는다고 믿게 했다. CEO로서 큰 능력이고 용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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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벽대전은 오나라와 손권에 있어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위나라 조조 측에서 본다면 승리는 곧 천하통일을 의미하지만 패배해도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조조의 위나라와 손권의 오나라는 압도적인 국력 차가 있었다. 조조는 이미 나라의 기반이 단단하고 정권도 확고했지만 손권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만약 손권이 패배한다면 오나라는 그냥 와해될 형편이었다. 손권이 싸우지 않고 항복했어도 오나라는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명이 동남풍을 기원한 배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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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쪽의 병력 수를 보더라도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조조군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지만 20만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조가 북쪽에서 거느리고 온 군사가 기병을 중심으로 약 15만 명, 항복한 형주군이 수군을 중심으로 5만 명 정도였다. 형주군은 조조군에 편입된 지 얼마 안 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오나라 손권군은 모두 끌어 모으면 5만 명은 될 것이나 바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 명 정도였다.  제갈공명이 손권과 회담할 때 유비군이 2만 명이 넘는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외교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보유 병력을 약간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비가 조조에게 급하게 쫓겨 패잔병 신세로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지키고 있던 강하(江夏)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 뒤 조조군에 가담하기 싫어한 형주 군사들이 합류했으나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유비군을 2만 명으로 봐도 오나라 3만 명과 합쳐 5만 명밖에 안돼 조조군 20만 명과 상대가 안 된다. 그러나 오·촉 연합군엔 장강의 험난함과 훈련된 수군이 있었고 싸움에 지면 죽는다는 비장한 위기감이 있었다.



  조조는 천자를 업고 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멀리 원정 왔다는 것, 또 주력인 북쪽 기병들이 수전에 미숙하고 풍토병에 약하다는 취약점이 있었다. 사실 조조 군사들은 급하게 진격하느라 지쳐 있었고 고온다습한 낯선 기후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오나라 총사령관 주유는 조조군의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수군에 의한 단기 결전으로 결판을 내고자 했다. 
주유는 유비 병력을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주유가 오나라 함대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유비와 처음 만났을 때 유비가 오나라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하자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장군은 제가 어떻게 조조를 깨뜨리는지 구경이나 하십시오" 하고 장담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비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돼 만약의 경우 도망갈 수 있게 병력을 배치했다 한다. 장강을 끼고 북쪽 오림(烏林) 부근엔 조조군이, 남쪽 적벽(赤壁)엔 주유군이 진을 치고 대치했다. 먼 북쪽에서 온 조조군은 물에 익숙하지 않고 갑자기 병사들이 몰리는 바람에 전염병이 번졌다. 음식도 맞지 않아 사기가 떨어졌다. 병사들이 뱃멀미로 고생했기 때문에 배를 10여 척씩 쇠사슬로 묶어 흔들리지 않도록 했다. 적벽은 낮은 구릉인데 강 건너 북쪽 오림(烏林) 일대가 다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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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주유가 부하 장군들과 적벽에 올라 강 건너편을 보니 위나라 병영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병력도 엄청났다. 옆에 있던 노장 황개(黃蓋)가 조조 진영을 자세히 살피더니  "적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적으니 단기 결전으로 끝내야 합니다. 적의 함선이 모두 쇠사슬로 묶여 있으니 불로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건의했다. 주유도 동의했다. 지금도 무한(武漢)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인 포기시(蒲圻市) 적벽에 가 보면 익강정(翼江亭)이란 조그만 정자가 있다. 주유가 황개와 화공책을 협의하고 나중 전투 지휘도 했다는 곳이다. 겨울철 장강에는 보통 북에서 남으로 바람이 불지만 1년에 며칠씩은 드물게 동남풍이 분다 한다. 그 며칠을 이용해 주유는 조조군을 화공책으로 기습해 배를 불태우고 대승리를 거둔다. 배가 모두 쇠사슬로 묶여 있어 한번 불이 붙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조조는 허둥지둥 배에서 탈출해 죽을 고생을 하며 조인(曺仁)이 지키는 강릉(江陵)으로 도망간다. 소설 삼국지에선 이 장면을 웅장하고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로 삼국지의 클라이맥스로서 모두가 감격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조조군이 배를 묶게끔 방통(龐統)이 연환계(連環計)를 쓰고 황개가 고육계(苦肉計)를 써 조조에게 거짓 항복을 하는 등의 극적인 장면이 많다. 특히 공명이 눈부신 활약을 해 하늘에 빌어 동남풍을 불게 하고 안개 낀 밤에 조조군의 영채에 다가가 조조군의 화살을 10만 개나 얻어 오는 등 신출귀몰한 활약을 한다. 적벽 부근엔 공명이 동남풍을 빌었다는 배풍대(拜風臺)를 비롯한 적벽대전의 유적들이 많다. 소설을 형상화한 것으로 모두 후대에 만든 것이다. 적벽이란 말은 조조군의 선박이 타면서 그 화염으로 남쪽 벽이 벌겋게 물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다. 지금 적벽 바위에 있는 ‘적벽’이란 붉은 글씨는 주유가 승전 후 직접 쓴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적벽대전은 손권군의 완벽한 승리로 제일의 공로자는 역시 총지휘관인 주유(周瑜)다. 그래서 부근엔 주유의 큰 동상이 장강을 등지고 서 있다. 동상은 최근에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아주 젊은 얼굴이다. 적벽대전 때 손권은 군 지휘권을 주유에게 맡기고 일체 간섭을 안 했다. 보급선을 이끌고 뒤따라와  "주(周) 장군이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겠다" 는 통지만 보냈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서 그렇게 통 크게 하기가 쉽지 않지만 손권은 늘 그렇게 했다. 나중 관우를 사로잡는 형주 탈환전이나 유비의 대군을 격파한 이릉(夷陵)대전에서도 현지 사령관에게 맡겨 결국 승리했다.  적벽대전 때 최고사령관 손권이 27세, 전투사령관 주유가 34세, 수석참모 노숙이 37세, 제갈근이 35세, 여몽이 31세였고 조조가 54세, 유비가 48세, 공명이 28세였으니 결국 젊은 패기가 이긴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생각하는 게 너무 많아 모험을 할 수가 없다. 나이 많은 장소(張昭)가 자꾸 항복론을 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경영자도 보통 나이가 들면 신중해져 모험을 피하게 된다. 무리한 모험도 위험하지만 너무 신중하게만 했다간 기업이 기회를 놓치게 된다. 젊은 손권은 젊은 신하들의 적극론을 받아들여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소설 삼국지에선 조조가 회복 불능의 타격을 받은 것으로 돼 있으나 정사는 조금 다르다. 조조군이 패배한 것은 화공책에 의해 완벽하게 깨진 것이 아니라 전염병과 북쪽에 대한 불안 때문에 조조가 선단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는 것이다. 적벽대전에서 죽은 병사는 대부분 항복한 형주 수군이고 조조가 데려온 북쪽의 기마군단은 무사히 귀환했다 한다.



 
적벽대전 후 조조는 강릉으로 일단 피신했다가 강릉을 조인에게 맡기고 양양으로 해서 허창으로 귀환한다. 오림에서 도망갈 때도 습지와 겨울 추위, 비바람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소설에서처럼 제갈공명의 귀신 같은 작전에 걸려 혼비백산한 것이 아니라 질서 있게 후퇴했다는 것이다. 기마군단을 무사히 귀환시키기 위해 병사들이 진흙탕을 메우고 길을 내느라 많이 희생됐다. 강릉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한데 조조는 쫓겨 가면서  "유비는 정말 군사적 안목이 없다. 만약 유비가 미리 불을 놓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겠느냐" 는 말을 했다고 한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해 강동 정벌과 천하통일엔 실패했지만 형주 북쪽을 점령해 늘 불안하던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무엇보다도 눈에 가시 같던 유비를 형주 북쪽에서 쫓아낸 것이 통쾌했을 것이다.


 
손권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조조와의 결전을 결단해 통쾌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권위와 위신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손권은 전쟁 전에도 신하들의 신뢰를 받았지만 훌륭한 전쟁 지휘를 통해 더욱 존경을 받았다. 국내의 통일과 정치적 안정도 이룩했다. 손권은 전후 처리에서도 정치력을 발휘했다. 수훈을 세운 주유·노숙·황개 등을 크게 포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항복을 주장했던 장소 등도 내치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둬서 참모 역할을 하도록 했다. 생각은 달라도 다 같이 나라를 위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손권은 부하의 장점을 주로 보고 단점은 적게 보려 했다. 그래서 신하가 잘한 것은 많이 칭찬했지만 불만스럽거나 섭섭한 것은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 그래서 모두가 손권으로부터 신뢰받는다고 믿게 했다. CEO로서 큰 능력이고 용인술이다.  손권이 젊은 나이로 CEO의 자리를 굳힌 것은 막강한 주유(周瑜)를 자기 사람으로 만든 것이 결정적 요인이다. 주유는 손권보다 7세나 많았다. 손권과 강동의 주인 자리를 다퉜다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상대였다. 손권의 형 손책이 죽을 때 장소에게  "나중 손권이 시원치 않거든 당신이 대신하라" 는 말을 은근히 했다. 근엄한 학자인 장소는 그 말을 들어도 손권의 자리를 뺏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유에겐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주유를 손권은 정성을 다해 대접해 충실한 신하로 만든 것이다.  적벽대전 중에 조조가 주유를 회유하려 사람을 보내자 주유는  "대장부로 태어나서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을 만났으면 밖으로는 군신의 의리로 받들고 안으로는 부모형제의 정으로 맺어 화복(禍福)과 생사(生死)를 같이 해야 하거늘 무슨 다른 생각을 하겠는가"  하고 한마디로 끊어 버린다. 그만큼 손권에게는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적벽에는 주유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글씨가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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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벽대전 후 주유는 뒤처리에 바빠 노숙이 먼저 귀환했는데 손권이 마중을 나갔다. 노숙은 수석참모로서 주유를 도와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손권이 "내가 문 앞까지 나가 말에서 내려 당신을 마중했는데 이만하면 당신의 공로에 대한 대접이 되겠느냐" 고 물었다. 노숙은 "아직 미흡합니다. 앞으로 주군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제업(帝業)을 이룬 다음 저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게 돼야 제대로 대접받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해 같이 크게 웃었다 한다. 그만큼 손권은 신하들과 큰 뜻을 같이하고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것이다. 


  적벽대전의 가장 큰 승자는 손권이지만 유비도 적지 않은 몫을 챙겼다. 만약 조조가 이기거나 어중간한 강화라도 했으면 유비의 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손권이 완벽한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연합군인 유비도 승리의 배당을 받을 수가 있었다. 적변대전 후 주유는 조인이 지키고 있던 강릉성을 빼앗아 형주 중부를 장악한다.
유비는 공명의 계책에 따라 주유와 조인이 강릉성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틈을 타고 재빨리 장강 남쪽 유표의 옛 땅인 무릉(武陵), 영릉(零陵), 계양(桂陽), 장사(長沙)를 점령한다.



 
주유로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양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손권은 유비가 차지한 장강 이남 땅을 유비의 영토로 인정하고 강릉 건너편의 땅을 떼어 준다. 유비는 그 땅을 공안(公安)이라 이름 짓고 임시 도읍으로 삼는다. 유비로선 정말 오랜만에 자기 영토와 도읍이 생긴 것이다. 공명이 임승(臨丞)에서 형주 남쪽의 행정을 총괄한다. 이리하여 유표가 다스리던 형주는 북쪽의 남양과 양양 일대는 조조, 중간 요지인 남군(강릉)과 강하는 손권, 남쪽 4군, 즉 무릉· 영릉· 장사· 계양은 유비의 영토로 분할됐다.


 
유비는 무엇보다도 형주성이 탐났다. 그러나 그것을 뺏을 만한 실력은 없었다. 주유에게 몇 번 청을 넣었으나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권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했다. 유비는 유표의 옛 사람들이 자기 밑에 몰려와 자기의 영토로는 이들을 다 먹여 살릴 수가 없으니 형주성을 다른 땅을 얻을 때까지 빌려 달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땐 손권과 유비는 처남 매제 사이가 돼 있었다. 적벽대전 다음해에 손권은 유비를 자기편으로 확실히 끌어들이기 위해 누이동생을 상처한 유비의 부인으로 보낸 것이다. 그때 유비의 나이는 50세가 넘었고 손권의 누이는 20세 정도였으니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다. 당시는 정략결혼이 성행할 때였다. 조조도 애초 강동의 손책을 달래기 위해 손책 집안에 조씨 딸을 준 적이 있다. 동맹과 배신이 되풀이되는 천하 대란기엔 혼인에 의해 약속을 다짐받곤 했다. 유비는 장가 간 그 다음해 손권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당시 오나라 도읍지 진강(鎭江)으로 직접 찾아간다. 이때 직접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유비는 형주를 빌리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고집을 부려 손권을 만나러 간다. 보통 땐 매우 신중하지만 필요할 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유비의 장점이다. 유비의 청을 받은 손권은 선뜻 결심을 하기가 어려웠다. 우선 오나라 안에서 반대가 많았다.



 
특히 오나라 제2의 실력자 주유는  "유비는 결코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이참에 없애든지 오나라에 억류시켜 후환을 없애야 한다" 고 강력히 주장했다. 심지어 미인계를 써서 유비의 혼을 빼놓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비와 가까운 노숙(魯肅)이 아직은 오나라의 힘이 미약하니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어쨌든 유비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적벽대전에 패해 조조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언제 다시 쳐들어 올지 몰랐다. 또 형주 사람들을 단결시켜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하려면 유비의 도움이 필요했다. 현실파인 손권도 오나라의 실력과 한계를 잘 알았다. 그러나 형주를 유비에게 주기도 아까웠다. 그래서 손권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공교롭게도 마침 그 즈음에 주유가 급병으로 죽는다. 38세로 한창 일할 때였다.



 
주유는 후임으로 노숙을 천거해 노숙이 오나라의 군사령관이 된다. 친유비파인 노숙이 병권(兵權)을 장악하자 유비에겐 매우 유리한 환경됐다. 그래서 유비는 형주를 빌리는 데 성공한다. 만약 손권이 일찍 주유 편을 들었거나 주유가 그때 죽지 않았으면 그 후의 유비나 촉나라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다 하늘의 뜻이고 유비의 행운이다. 그래서 일은 사람이 도모하지만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출처 :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 포브스 심층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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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좀 뻐근하네요.!!
방문자 수가 급감하니까 좀 보기 그러네요. 저 놈의 그래프가 사람 기분 좋게 만들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만들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개인적으로 삼국지 경영학은 이번편이 제일 별로였다고 생각합니다.
위, 촉, 오 삼국의 CEO를 다뤄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요지일텐데 손권편 특히 이번편에서는 너무 곁가지가 많은 느낌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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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그러고보니 서울에서 열렸던 도서전에서 삼국지 경영학 책도 봤답니다. 완간된 형태로 따로 내신 모양인데 저는 이미 정기구독중에 읽어서 구매욕구는 들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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