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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29) - 손권

손 아픈 원로 참으며 잘 부려..
옳은 쓴소리엔 깨끗이 승복



 손권은 외교뿐만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매우 유연했다. 손권은 성격이 활달해 일을 잘 저질렀지만 신하들이 충고를 하면 잘 받아들이는 장점을 지녔다. CEO로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손권은 또 물려받은 신하들을 잘 구슬리며 자신의 뜻을 관철해 나가는 데에도 거의 천재적 자질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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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의 세 영웅 조조·유비·손권의 관계를 보면 조조와 유비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사이고 손권이 그 가운데에서 유연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조조는 한나라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실 부흥을 기치로 삼고 있는 유비와는 명분상으로도 서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또 조조와 유비와는 애증 관계가 심했다. 청년 시절부터 둘은 잘 알았고 또 그릇이 됨을 서로 인정했다. 조조가 일찍 기반을 잡아 어려웠던 유비를 많이 도와줬고 유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도 썼다. 그러나 유비는 남의 밑에 있기엔 그릇이 너무 커서 조조 밑을 떠나 자립한다. 유비는 조조의 보호를 받다가도 안면을 바꿔 기습 공격을 하기도 하고 조조의 적 편에 가담하기도 했다. 조조의 명운이 걸렸던 관도(官渡)대전 때 유비는 원소(袁紹) 편에서 조조와 싸웠다. 조조는 유비를 배은망덕이라고 괘씸하게 생각해 끝까지 없애려 한다. 나중에 유비가 촉(蜀)나라를 차지한 후 한중(漢中)을 놓고 조조와 싸울 때 전장에서 마주 선다. 이때 조조는 채찍을 들어 유비를 가리키며 "유비야, 너는 은혜도 의리도 다 저버리고 조정까지 배반하는 역적놈" 이라고 욕을 한다. 이에 대해 유비는 "나는 바로 대한(大漢)의 종친으로 역적을 토벌하고 있다. 너는 스스로 왕이 돼 천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냐" 고 되받는다. 조조와 유비는 평화 공존이 불가능한 사이였던 것이다.




  손권에 대해선 조조는 개인적인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호의적이었다. 조조와 손권이 유수구(濡須口)에서 처음으로 맞부딪쳤을 때 손권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멀리서 보고  "아들을 낳으려면 손권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 손권에 비하면 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나 다름없다" 고 감탄한 적이 있다. 유표의 아들들이 물려받은 형주를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진 데 비해 손견의 아들인 손권이 자신과 당당히 맞서는 것을 평가한 것이다.



  조조는 정찰을 나갔다가 손권과 직접 부딪쳤는데 손권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채찍으로 조조를 가리키며  "승상, 중원을 차지하고 앉아 부귀가 극에 달했는데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 나의 강남을 침범해 오셨소이까" 하고 힐문했다. 조조가 "네가 신하가 돼 황실을 잘 받들지 않기 때문에 천자의 명을 받들어 특별히 토벌하러 왔다" 고 하자 손권은  "당신이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줄 어찌 모르겠소. 나는 한(漢) 황실을 받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토벌하고 나라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오" 하고 응수한다. 조조와 유비의 가시 돋친 대꾸보다 부드럽다. 이 싸움도 결국 교착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손권은 조조에게 "나와 승상은 같은 한나라의 신하인데 승상은 백성을 편안하게 할 생각은 않고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못살게 구오. 이제 봄이 와 강물이 차오르고 있으니 이쯤해서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추신(追伸)으로  "당신이 죽지 않아서 내가 편할 날이 없소" 하는 글을 덧붙였다.  이 편지를 보고 조조는  "손권이 나를 업신여기지는 못하는구나" 하고 만족해하며 군사들을 물렸다. 조조는 일찍부터 오나라의 손권 집안을 달래려는 정책을 썼다. 대표적인 것이 정략결혼인데, 손권의 조카를 며느리로 맞기도 하고 손책의 동생과 자신의 조카를 짝 지워 주기도 했다. 미움과 원한으로 뭉친 조조와 유비의 관계와는 달랐던 것이다. 이 싸움을 전후해 조조와 손권은 유수구 일대에서 몇 번을 싸웠으나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두 나라 다 상대방에게 치명적 타격을 줄 정도의 국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위나라 측에서 보면 동부 전선에서 장안(長安)을 노리는 촉나라 유비군의 동향에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서부 전선의 오나라와의 싸움에 전력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싸움에서 손권 측은 감녕(甘寧)이, 조조 측에서는 장요(張遼)가 눈부신 활약을 했는데 둘 다 적으로부터 항복해 온 장수였다. 조조도 인재를 포용해 잘 쓰지만 손권도 그에 못지않게 용인술(用人術)이 뛰어났던 것이다.



  손권은 유비에게 배신감을 많이 느꼈지만 조조라는 강적이 있기 때문에 유비와의 연대가 불가피했다. 조조와 유비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적대 관계였고, 그 사이에서 손권은 은근히 어부지리를 취했던 것이다. 기본 전략은 유비와 제휴해서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이지만 편의에 따라선 조조와 화해하고 유비를 공격하기도 했다. 손권은 조조와 싸울 땐 싸우지만 형세가 불리하면 조조에게 항복해 신하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만큼 처신이 유연했다. 세 사람은 마치 고스톱을 치는 것과 같아서 한 사람이 완승하는 것을 두 사람이 연대해 막으면서 자신은 이기려 하는 식이었다. 나중에 손권이 형주를 뺏기 위해 조조와 손잡고 촉나라의 관우와 싸울 때도 조조군은 관우군을 은근히 살려 보내 동맹군인 손권군과 싸우게 만든다. 손권군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또 이릉(夷陵)대전 땐 손권군이 유비군에 압승해 유비를 백제성(白帝城)까지 몰아붙이고도 마지막 숨통은 끊지 않는다. 촉나라를 괴멸시켜 버리면 위나라가 안심하고 오나라에 쳐들어올까봐 마지막 단계에서 군사를 돌려 위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던 것이다. 사실 이때 위나라는 국경 지대에 군사를 집결해 놓고 사태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조조와 유비는 일찍부터 낙양을 중심으로 중원에서 놀아 황하 중심의 천하통일을 꿈꿨지만, 손권은 강동 중심의 지방 정권에 만족했다. 적극파인 주유가 죽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유비와 조조는 전장에서 자주 만난다. 둘의 맞대결에선 조조가 압도적 우세를 보인다. 그러나 유비를 사로잡아 없애지는 못한다. 손권과 유비는 한번 크게 싸우는데 이때도 맞대결은 아니었다.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쳐들어갔지만, 손권은 대장군 육손(陸遜)에게 전권을 줘서 대신 싸우게 한다. 손권은 스스로 싸우기보다 유능한 장군을 보내 싸우게 하고 자신은 전체적인 지휘를 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젊었을 땐 혈기가 넘쳐 일선에서 직접 싸우기도 했다. 손권이 적벽대전 후 위나라와 싸우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적진 깊숙이 앞장서서 들어갔다가 역습을 당한 것이다. 놀란 부하들이 필사적으로 막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그 와중에 유능한 장수를 비롯해 많은 부하들이 죽었다. 이때 측근인 장굉(張紘)이  "전장에 나가 적장의 목을 베고 적의 기를 빼앗는 것은 일개 편장이 할 일이지 주군이 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 주군이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아군의 손해가 큽니다. 주군은 혈기를 누르고 패왕의 원대한 계책을 품으십시오. 앞으로는 스스로 자중하셔서 전장에 몸을 드러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충언을 한다. 손권은 이 말을 묵묵히 들으면서 "앞으로 조심하겠소" 하고 깨끗이 승복했다고 한다.



  손권은 외교뿐만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매우 유연했다. 성격이 활달해 일을 잘 저질렀지만 신하들이 충고를 하면 잘 받아들이는 장점을 지녔다. CEO로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부친 손견과 형 손책이 닦아 놓은 기반을 물려받은 손권은 손 아픈 신하들이 많았다. 갑자기 기업을 물려받은 재벌 2세와 비슷한 처지였다. 창업자 오너인 조조·유비와는 달랐다. 조조와 유비는 창업하고 키운 과정에서 닦은 카리스마가 대단해 신하들을 승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경륜과 실력이 있었던 것이다. 젊은 손권은 경험과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그러나 손권은 물려받은 신하들을 잘 구슬리며 자신의 뜻을 관철해 나가는 데 거의 천재적 자질을 보였다.  



  기업에서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젊을 때 기업을 물려받으면 손 아픈 원로들이 많다. 젊은 오너는 처음엔 이들의 말을 경청하다가도 곧 싫증을 내게 된다. 나이 많은 사람은 보수적이고 신중하다. 그러나 젊은 2세는 1세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기의 실적을 올리고 싶어한다. 그 과정에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다. 성미 급한 젊은 2세는 잔소리꾼들을 정리해 버린다. 그것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하는 확률이 더 많다. 구세대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부 혼란이 생기고 임직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아주 전략적, 기술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기업이 잘나갈 땐 CEO가 다소 서툴러도 큰 문제가 안 되나 어려움에 처했을 땐 결정적 실패로 연결되기 쉽다. 위기일수록 조직 내의 의사소통이 잘 되고 의견일치가 이뤄져야 하지만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후 많은 젊은 2세들이 기업과 더불어 쓰러졌는데, 평소 임직원들의 마음 관리에 서툴렀던 것도 큰 원인이다. 오너 CEO가 임직원들을 머슴으로 생각하면 임직원들은 스스로 머슴으로 의식하고 행동하게 된다. 머슴들만으로는 결코 기업을 유지·발전시킬 수가 없다. 이 머슴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땐 보복을 생각하게 된다.


 
   손권이 훌륭한 점은 아버지와 형님이 남긴 구신(舊臣)들을 잘 다뤘다는 점이다. 잔소리가 심한 그들을 갑갑해하면서도 성질을 죽여 가며 그들을 대우하고 또 활용한다. 대표적인 원로가 장소(張昭)와 장굉, 고옹(顧雍)이다. 장소는 손권보다 26세나 많다. 북쪽 출신의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학자로 매우 근엄한 성격의 외곬이었다. 손권의 형인 손책이 죽을 때 장소에게 동생을 부탁하며 손권이 시원찮으면 대신하라는 말도 했다 한다. 몇 년 뒤 손권의 모친이 운명할 때도 "아들을 잘 부탁한다" 는 간곡한 당부를 했다. 효성이 지극했던 손권은 장소에겐 늘 조심했다. 그래서 적벽대전 때 장소가 항복론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문에 부쳤고, 적벽대전 승리 후에도 장소를 여전히 중용했다. 장소는 손권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잔소리가 심했다. 사냥이나 술자리를 즐기는 손권에게 "좋은 주군이 되려면 노는 것을 삼가야 한다" 고 충고했다. 근엄한 선생님 같았다. 손권뿐 아니라 오나라 사람들이 모두 장소를 어려워했다. 손권은 나이가 50세가 넘고 주군이 된 지 30년이 넘어도 장소가 잔소리를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한번은 손권이 매우 화가 나서 칼자루에 손을 대며  "오나라 사람들이 궁중에 들어오면 나를 받들어 모셔도 궁을 나가면 당신을 더 무서워한다. 당신은 신하들 앞에서 내 체면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군다. 나도 가끔 내 인내의 끈이 끊어질까 두려울 때가 있다" 고 겁을 주었다. 장소는 황급히 엎드리며  "저도 이러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주군의 모친이 돌아가시면서 간곡히 당부한 것을 잊을 수가 없어서…" 하고 흐느껴 울었다. 이 말을 듣고 효심 깊은 손권은 칼을 거두고 같이 울었다 한다. 그 뒤로도 장소는 여전히 잔소리를 했다. 손권은 장소를 끝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내치지는 않았다.  오나라에서 처음으로 승상(丞相) 자리를 만들 때였다. 모두가 초대 승상엔 오나라의 최 원로인 장소가 임명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손권은 "요즘 같은 어려울 때엔 승상은 책무가 너무 무겁다. 장공(張公) 같은 최원로를 예우하는 자리가 아니다" 하고 무명의 손소(孫邵)를 임명했다. 손권은 장소를 승상에 앉히기 싫었던 것이다.



  3년 후 손소가 죽자 중신들은 다시 장소를 추천했다. 이때 손권은 "장공은 너무 강직하고 고집이 세서 사람들을 잘 다독이고 여러 의견을 조정하는 것이 어려울지 모른다" 고 핑계를 대고 고옹을 대신 임명했다. 손권도 훗날 "장공과 이야기할 땐 나도 늘 긴장해 허튼소리를 할 수 없었다" 고 술회했다. 그러면서도 손권은 장소가 81세로 죽을 때까지 36년간 곁에 두고 썼다. 악연(惡緣)이라면 악연인데, 손권의 위대한 인내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장소와 비슷한 원로가 장굉이었다. 대학자인 장굉은 한때 조조 밑에서도 일했는데 손책 때에 오나라로 와서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 조조 밑에 있었던 전력 때문에 모함도 더러 받았지만 손권이 끝까지 감싸고 신임했다. 손권이 장굉을 얼마나 신임했는지는 장굉의 건의에 따라 도읍을 경구(京口·지금의 진강)에서 건업(建業·지금의 남경)으로 옮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장굉은 60세로 죽으면서 손권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군주로서 널리 현인을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일시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이었다. 손권은 이 편지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손권이 장소 대신 승상으로 임명한 고옹도 근엄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평소 매우 과묵하고 술을 싫어했다. 연회 때 고옹은 술잔엔 손도 안 대고 사방을 둘러보기만 했다. 손권도 술자리에 고옹이 있으면 흥이 깨진다고 말할 정도였다. 집에서는 일체 말을 안 해 가족들도 고옹이 고위직에 있는 줄 잘 몰랐다 한다. 그래도 손권은 고옹을 신임하고 중용했다. 고옹이 장소보다 다소 편했던 것은 신하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손권을 반대하거나 충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손권의 체면은 살려 준 것이다. 손권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비서관을 고옹에게 보내 의견을 물었다. 만약 고옹이 그 문제에 찬성일 땐 구체적 방안에 대해 의견도 내고 음식도 대접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일 때는 묵묵히 아무 말도 안 하니 일찍 물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손권은 비서관이 음식 대접을 받았다고 보고하면 애초 안대로 시행하고 그냥 왔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재고했다 한다. 승상으로서 고옹은 매우 유능해 의견 조정이나 인재 발탁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고옹은 묵묵히 일하면서 잘된 것은 모두 손권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것은 자신이 책임졌는데, 그렇다고 손권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첨하지는 않았다. 고옹이 승상으로 19년을 지내고 76세로 죽었을 때 손권은 소복을 입고 참석해 충신의 죽음을 슬퍼했다 한다. 그런 고옹을 승상으로 발탁해 쓴 손권의 용인술이 대단하다 할 수 있다.
 
출처 :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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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편과 유비편에 비해 손권 편은 다소 필력이 떨어진게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다지 흥미를 끌지는 않았거든요.  삼국지 경영학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잡지를 정기구독하게 되면 그 잡지에서 얻는 정보는 좋은데, 자리를 차지하는 것 때문에 곤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일장일단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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