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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16) - 유비



유비의 감성리더십


아랫사람 끝까지 신뢰하고 백성을 진심으로 보살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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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 밑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은 대의명분이 좋고 성심성의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 기본이 되지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감성리더십도 한몫을 한다. 그런 감성도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진실된 마음 없이 연기만으론 일시적으로 사람을 감동시킬지 모르나 많은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 유비는 어찌 보면 바보스럽다고 할 정도로 진실할 때가 많다. 
그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이익이 됐다. 그렇다고 유비가 욕심과 야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큰 욕심과 야심이 있었기에 작은 것은 양보한 것이다. 보통 작은 욕심 때문에 큰 것을 망치기 쉽다. “큰 부자는 잔돈을 아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눈앞의 작은 이해에 혹해서 신뢰와 명성을 잃으면 결코 큰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나라 경영자 가운데에서도 머리가 좋고 부지런하지만 작은 것을 너무 아끼는 인색함 때문에 기업도 못 크고 재계의 신망도 얻지 못하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유비의 경우를 보면 천성인지 전략인지 작게 양보하고 크게 얻는다. 타고난 마음가짐이 없이는 그런 생각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그걸 일일이 계산해서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품성이고 그릇이라 할 수밖에 없다. 보통 땐 그런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 모르나 생사가 걸린 위급한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유비가 형주에서 조조 대군의 습격을 받아 도망갈 때의 일이다. 유비는 형주의 최고 통치자인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다가 유표가 죽고 그 아들이 조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급하게 도망을 가게 되었다. 유비에게 유감이 많은 조조는 이참에 유비를 잡아 후환을 없애겠다고 추격대를 몰아 쫓아온다. 이때 조조 군사를 겁낸 많은 사람이 유비를 따라나서는데 가재도구를 실은 수레가 수천 대에 이르고 피란 행렬이 몇 십리에 뻗쳤다 한다. 그러니 그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조조의 추격병이 바짝 따라오자 애가 탄 신하들이 “이러다간 모두 잡혀 죽겠으니 피란민들을 떼어 놓고 빨리 피신하자”고 건의한다. 이 말을 들은 유비는 “모든 일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 것인데 백성을 버리고 우리끼리 도망가서 무얼 하겠느냐. 모두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부하들로선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런 판단과 행동은 유비같이 위대한 경영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계산에 의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일을 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당장의 이해를 초월한 유비의 그런 큰마음이 없었더라면 유비도 한낱 작은 두목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기업 경영에서도 역사적으로 남을 위대한 사업들은 그런 계산을 초월한 데서 태어났다. 오늘날 일본 도요타(豊田)자동차는 이미 포드를 추월해 세계 2위로 올라섰고 만년 수위인 제너럴모터스(GM)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창업자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郞)가 70년 전 자동차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시골의 조그만 직기(織機) 공장에 불과했다. 모두 재벌들도 하기 힘든 무모한 짓이라고 반대했으나, 창업주는 꿈과 정열, 고집으로 밀어붙여 오늘날 도요타의 기반을 닦았다. 삼성의 반도체사업이나 현대의 조선사업도 마찬가지다.




유비가 고집을 부리는 통에 유비 일행은 당양(當陽)의 장판파(長坂坡)에서 조조군에 추월당해 무참하게 깨진다. 유비는 가족조차 버리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간다. 이때 조자룡이 유비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적진 속으로 뛰어 드는데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이 “조자룡이 적군에 항복하러 갔다”고 보고한다. 그 말을 듣자 유비는 작은 창을 집어던지며 “조자룡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두고 보아라, 곧 나에게 올 것이다”라며 굉장히 화를 냈다 한다. 유비는 아랫사람들을 신뢰했고 이들도 그걸 잘 알아 유대감이 두터웠다. 황권(黃權)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유비가 촉나라에 들어가 얻은 장수인데 성질이 곧고 충성심이 강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와 싸움을 벌일 때 같이 갔다가 촉군이 참패하는 바람에 퇴로가 완전히 막혔다. 유비도 목숨만 겨우 건져 백제성(白帝城)에 피신했다. 황권은 할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했다. 위나라에선 환영받았는데 촉나라에서 황권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주위 사람들이 위로한 즉, 황권은 “헛소문일 것이다. 우리 주군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태연했다 한다. 과연 촉나라에선 항복한 장수의 가족을 살려 둘 수 없다며 처단하자고 했으나 유비는 “황권이 항복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가족들을 잘 보호해 주어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 후 가족이 잘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황권은 유비의 은혜에 거듭 감사하고 주위에서도 군신 간의 깊은 신뢰관계에 감탄했다. 후에 유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황권은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한다.


  장판파에서 조자룡은 유비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적진 속을 헤매다가 하늘의 도움으로 먼저 감(甘)부인을 구한 뒤 후주(後主)가 되는 아들 유선(劉禪)을 찾는 데 성공한다. 조자룡은 유선을 품에 안고 적진 속을 뚫고 나온다. 조조가 높은 곳에 올라 전장터를 바라보니 한 장수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전장터를 누비는데 이르는 곳마다 위나라 장수들이 피를 쏟고 쓰러진다. 조조가 놀라 옆에 있던 조홍(曹洪)에게 저 장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조홍이 내려가 알아보고는 “유비의 부하 조자룡”이라고 복명했다.  사람 욕심이 많은 조조는 “조자룡을 붙잡아 내 부하로 만들 테니 절대 활을 쏘지 말고 사로잡아 데려 오라”고 명령한다. 조자룡으로선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활을 쏘지 않으니 창과 칼로써 싸우면 되는데 그 방면에선 조자룡이 천하무적이었다. 덕분에 조자룡은 손끝 하나 다친 데 없이 적진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품속에 있던 유선도 무사했다. 유선은 후에 촉나라 2세 황제가 될 운명이었으니 역시 하늘도 돕는가 보다.  조자룡이 땀투성이가 되어 후방에서 한숨 돌리고 있던 유비를 찾아가 유선을 품속에서 꺼내니 그때까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유선을 건네받은 유비는 “이 하잘 것 없는 아이 때문에 나의 귀중한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며 유선을 내던져 버렸다 한다. 조자룡이 얼른 받아 무사했지만 몹시 감격했을 것이다. 이런 주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새삼 각오했을지 모른다. 유비에겐 그런 매력이 있었다.



  일찍이 장비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비가 관우와 같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장비에게 본거지 성과 가족을 맡기고 갔다. 그리고 술을 많이 마시지 말고 잘 지키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처음 며칠은 조심하더니 결국 장비는 술을 마시고 사고를 쳤다. 적군에게 성을 뺏기고 가족을 남겨 둔 채 유비에게로 도망을 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유비는 기가 막히면서도 장비를 위로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관우가 장비를 몹시 나무랐다. 그러자 장비는 칼을 빼 스스로 목을 찌르려 했다. 이때 유비는 급히 말리면서 “옛날부터 처자는 의복이고 형제는 손발이라 했는데 의복은 갈아입을 수가 있지만 손발은 갈아 낄 수 없는 것이다. 아우는 너무 상심 말라”며 달랜다. 요즘 같으면 큰 일 날 말이지만 당시엔 그런 말이 통했다. 난세이고 매일 전쟁을 치르다 보니 처자는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유비인들 어찌 가족이 소중하지 않겠는가마는 형제 간의 의리나 군신 간의 관계가 더 무겁다고 본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장비는 감격해 엉엉 울었다 한다.  



   유비는 말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한마디 할 땐 상대방을 감격시키곤 했다. 삼국지 정사(正史)에 유비가 아랫사람들을 잘 챙기고 말이 적으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위대한 경영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말이 적을 수밖에 없다. 말이 많으면 소용없는 말이 자연 섞이게 된다. 또 많은 말을 할 시간도 없다. 말이 적은 대신 핵심을 정확히, 또 명료하게 전달한다. 회의를 하더라도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이병철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이 지시할 때 보면 간단명료하다. 결정할 때까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도 일단 판단이 서면 명확하게 지시를 내린다. 결코 관념적이거나 모호한 지시로 아랫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 개념이 모호한 설교를 오래 하지도 않는다. 아주 실질적이다. 그들은 능변이 아닌 가슴에 와 닿게 말을 한다. 말수는 적어도 자신의 뜻과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유비는 50세가 다 되어 형주에 근거지를 마련하기까지 천하를 떠돌았다. 유비는 남의 밑에 있기엔 야심이 너무 큰 사람이어서 늘 어렵게 지냈다. 유비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괴로웠다. 오너경영자감인데 자기 기업이 없으면 고달플 수밖에 없다. 남의 밑에서 전문경영인을 하기엔 그릇이 너무 크고 창업을 하기엔 힘이 모자라면 죽을 지경이 될 것이다. 유비가 조조나 원소 밑에서 전문경영자로 만족했으면 인생 후반을 편히 보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체질상 그것이 안 되었다.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하기 전의 일이다. 유비는 조조나 원소 두 사람 모두에게 쫓기고 있었다. 넓은 천지에 몸 둘 데가 없었다. 그때 유비와 그 일당들이 조조군에 허겁지겁 쫓기다 강가에서 한숨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주린 배를 채운 후 일행의 몰골을 보니 유비는 기가 막혔다. 이 많은 식구가 자기를 믿고 쫓아다니는데 앞길이 막연하다. 그래서 유비는 울면서 말한다.  “당신들은 천하의 인재들로서 어느 주인한테 가도 환영받을 것이다. 박복한 나를 따라다니느라 너무 고생이 많다. 나의 각박한 운명 때문에 당신들의 전도가 암담하다. 나도 나의 앞길을 장담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 좋은 주인을 섬기라”고 말한다. 유비가 이 말을 하자 모두가 통곡한다. 유비인들 이들과 헤어지고 싶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장래를 위해 떠나라고 말한 것이다. 사심 없는 유비의 진실됨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때 관우가 일동을 대표해서 말한다. 관우는 유비의 가신단 가운데에서 인연이 가장 오래되고 또 무게에 있어서도 으뜸이었다.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옛날 한고조(漢高祖)도 늘 항우(項羽)에게 쫓기다가 마지막 싸움에 이겨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번 싸움에 졌다 하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감격해 유비는 다시 울고 일동도 충성을 맹세했다. 궁핍하다 해서 유비의 신하들은 유비를 떠나지 않았다.


    
유비의 목표하는 바가 바르고 사심이 없으며 아랫사람을 진정으로 위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유비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 불과했는데 관우 조운 등 천하의 인재들이 유비 밑에 똘똘 뭉쳐 생사를 같이한다. 유비는 여왕벌 같은 구심점이 된다. 유비 일행은 거기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선후책을 의논한다. 이때 가신 손건(孫乾)이 “여기서 형주가 멀지 않으니 거기로 가면 어떻겠습니까. 형주의 통치자 유표는 풍족하고 또 같은 종친이니 우리를 받아줄지 모릅니다. 제가 가서 교섭하겠습니다.”  그래서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가서 7년간 몸을 의탁하게 되는데 유표도 유비를 만난 적이 없으나 이름은 널리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몸소 성 밖까지 나와서 유비를 맞아들이고 후대한다. 유표로선 북쪽의 조조에게 신경을 쓰던 때라 형주 북쪽의 신야(新野)성을 유비에게 주고 거길 지키라고 한다. 이때가 유비 일생에 가장 평온했던 시기로 장래에 대비한 힘을 기른다.



출처 :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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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월요일.!!
글을 읽을 때 현재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글이 쓰여진 시기에 맞춰진 것이므로 감안해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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