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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24) - 유비

유비의 후계자와 제갈공명


사심 없이 아들과 나라 맡긴 유비…

공명은 목숨 바친 충성으로 보답



  유비는 세상을 뜨면서도 아들 걱정을 많이 해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했다. 황태자인 유선(劉禪)은 17세에 불과했다. 본래 황족이라 해도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난 유비는 아들을 보호해 줄 유력한 일가 친족이 없었다. 라이벌인 조조나 손권은 집안의 유력자들이 새 황제를 둘러싸고 보호한 것과 대조적이다. 유비가 형제처럼 믿고 의지한 관우, 장비는 이미 죽었다. 황태자 유선은 나이가 어린 데다 성격이 온순해 난세를 헤쳐나가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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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후사 안에 있는 유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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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는 임종에 즈음해 황태자 유선에게 유언을 남긴다. 자신을 반성하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자상함이 가득 배어 있다.  "나의 병은 처음엔 단순한 설사로 생각했으나 이젠 합병증까지 생겨 회복이 어렵게 됐다. 인생 50이면 짧다고 할 수 없는데 나는 60을 넘기고도 몇 년 더 살았다. 한도 없고 후회도 없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너희 어린 형제들이다. 신하들은 황태자의 재능이 뛰어나다 하는데, 사실이라면 그보다 더 다행이 없겠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다. 악행은 아무리 작아도 저질러서는 안 되고, 선행은 아무리 작아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현명하고 덕이 있어야 한다. 나는 덕이 부족했다.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서(漢書), 예기(禮記), 제자백가(諸子百家), 신자(申子)·상군서(商君書) 같은 옛 글을 부지런히 익혀 본받도록 하라. 더욱 노력해 힘쓰길 간곡히 당부한다."  유비다운 제왕학(帝王學)의 전수다. 유비가 스스로 부덕했다고 말한 데서 유비의 겸손을 엿볼 수 있다. 또 법가적인 책들을 천거해 시대의 흐름에 맞는 통치를 당부하고 있다.



  유비의 후계 포석은 평소의 인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조조는 임종 때 아들들에게 사마의(司馬懿)를 경계토록 신신당부한다. 사마의가 위나라의 기둥으로서 큰 공을 세웠지만 끝까지 안심을 못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위나라의 군사력은 같은 집안인 조씨와 하후(夏候)씨가 장악했다. 사마의는 조조의 손자인 명제(明帝) 때 반란 혐의로 삭탈관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견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위나라 조조의 후손은 사마의에게 나라를 뺏기고 만다. 손권도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육손(陸遜)을 핍박해
죽음으로 몰고 간다.



  유비는 자신의 사후 최강의 권력자가 될 공명을 견제하기보다 아예 유선과 공명의 공동경영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공명이 결코 아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나라를 대신 차지해도 좋다고까지 말한다. 전폭적인 신임이다. 그것이 오히려 공명을 더 감격하게 해 끝까지 충성을 바치게 한다. 유비의 부드러우면서도 위대한 리더십이다. 또 가장 현명한 판단이기도 했다. 유비의 후계자는 다소 모자랐지만, 후계 구도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영명한 군주의 자질을 갖췄다고 볼 수 없는 유선이 유비 사후 40년간 황제 자리를 지키면서 나라를 보전했다. 유비로부터 공명을 아버지와 같이 모시고 모든 것을 상의하라는 간곡한 당부를 충실히 지킨 덕분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결코 황제의 실권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
다. 유비가 시킨 대로 자신의 분수에 맞게 행동한 것이다.  




  기업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기업이 영속하려면 후계 구도가 좋
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창업주가 그 준비에 소홀하다. 아무리 빈틈없이 시스템을 마련해도 후계자가 제멋대로 하면 소용이 없다. 젊어서 기업을 계승하면 처음엔 원로들의 의견을 잘 따르다가도 나이가 들면 스스로 포부를 펴보고 싶어한다. 2세의 측근들이 그것을 은근히 부추긴다.  '제2의 창업', '개혁 원년' 같은 구호가 나붙고 대대적인 2세 띄우기 캠페인이 벌어진다. 그런 젊은 도전이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2세들은 대개 창업주 1세를 뛰어넘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거창한 새 사업을 일으킨다.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기업이 무너졌는데, 그 중에는 2세들의 과욕에 의한 것들이 많았다. 젊은 2세들은 기업 경영의 복잡성과 인과 관계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공의 길이 빤히 보이는 것 같지만 잘 안 되는 것이 기업경영이다.



  2세들이 특히 실패하는 것은 인간 관계다. 2세들은 대부분 창업주가 성공해서 권위도 갖추고 황제 노릇을 하던 모습에 익숙해 그 흉내를 내려 한다. 사람과 시대가 바뀐 것을 모르기 쉽다. 창업주 1세는 그렇게 되기까지 갖은 간난을 다 겪고 성공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카리스마도 있다. 그들은 사업할 땐 냉정하지만 속이 깊고 인정도 있다. 마음의 기미(機微)를 잘 알아 사람을 잘 부린다. 그런 능력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 2세는 합리성과 효율성만으로 사람을 부리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심복시키기가 어렵다. 유능한 인재들이 심복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지 않으면 기
업이 발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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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환위기 후 도산한 기업 중에는 내부의 인간 관계 때문에 망하거나 낭패를 본 기업이 많다. 사람을 내보낼 때도 창업 1세들이 훨씬 노련하다. 결정을 하는 것은 창업주이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악역은 다른 사람이 한다. 마지막 인사를 받을 때는 정말 안타깝고 서운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적인 정(情)을 베풀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대세라 생각하고 창업주와 회사를 원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젊은 2세는 이런 인간적 배려에 서툴다. 자존심을 못 세워 줄 뿐 아니라 가슴에 상처를 주는 행동까지 한다. 그것도 대부분 모르고 한다. 그래서 가슴에 한을 품고 회사를 떠나게 되고, 더러
는 보복까지 하는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陳壽)는 유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유비는 넓은 식견과 포용력을 갖추고 의지가 굳었다. 좋은 인재에겐 허리를 굽혀 가르침을 받았다. 한고조 유방(劉邦)의 풍모를 닮은 영웅의 그릇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아들과 나라를 제갈공명에게 맡겼는데 한 점의 사심도 없었다. 가히 군신 관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조보다 권모술수가 뛰어나지 못했고 영토가 협소했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조의 신
하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안락보다 대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CEO로서 유비의 자질을 보면 확실한 비전을 갖고 불굴의 의지를 갖췄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한나라를 부흥시켜 백성들을 전란에서 구하고 편안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높은 뜻을 갖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작은 성공이나 현재의 안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조조에게 저항했다. 일의 성패는 하늘에 맡기고 옳다고 생각한 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게 원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아무래도 신축성이 모자라 현실적으로는 손해를 봤다. 권모술수가 모자란다는 평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재가 끌린 것은 넓은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믿었다. 임종 때 제갈공명에게 한 당부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그 정도까지 이룬 업
적을 볼 때 유비는 통 크고 훌륭한 경영자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공명은 유비의 영구를 성도(成都)로 옮긴다. 촉나라 사람들은 어버이를 잃은 자식같이 슬퍼했다. 유비는 그만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유비의 묘 혜릉(惠陵)은 성도 무후사(武侯祠) 안에 있다. 무후사는 공명이 무향후(武鄕侯)를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그 안엔 유비의 능과 사당이 있고 뒤편에 따로 공명의 사당이 있다. 유비와 공명은 살아서도 ‘물과 고기’와 같이 붙어 지냈고, 죽어서도 한 울타리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유비와 공명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상적인 군신 관계에 감탄과 부러움을 함께 보낸다. 유비와 공명은 서민들에게 큰 인기가 있어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때도 홍위병들이 차마 손대지 못했다 한다. 유비의 묘는 매우 검소한 편이다. 형주에서 죽은 감부인(甘夫人)과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 얻은 오(吳)부인이 합장돼 있다.



  황태자 유선이 바로 제위(帝位)에 오르자 공명은 승상에다 익주목(益州牧) 사례교위(司禮校尉)를 겸해 촉나라의 문무전권을 쥐게 됐다. 유비가 살아 있을 땐 외교와 국방은 유비가, 나머지 행정 전반은 공명이 맡았는데, 이젠 공명이 모든 것을 다 챙겨야 했다. 공명의
힘겨운 역정이 시작된 것이다.



  공명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남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과 오나라와의 국교를 다시 여는 일이었다. 촉나라가 오나라에 패하고 유비가 죽은 틈을 타 남쪽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압군을 남방에 보내기 위해선 오나라의 양해가 불가피했다. 공명은 유능한 외교관 등지(鄧芝)를 오나라에 보내 국교 정상화에 성공한다. 그 뒤 공명은 대군을 지휘해 남방 정벌에 나선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공명의 위신이 크게 높아졌고, 이릉패전으로 땅에 떨어졌던 촉나라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또 풍요한 남방을 평정해 촉나라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확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국방력을 강화하고 경제를 튼튼히 한 다음 강대국 위나라를 정벌하는 일에 착수했다. 공명인들 국력 차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가만히 있다가는 약소국 촉나라가 버티기 어려우니 차라리 적극 공세로 나간 것 같다. 또 유비 없는 촉나라를 이끌고 가기 위해선 긴장과 분발이 필요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2인자 공명의 고뇌가 곳곳에서 나온다. 오너 아닌 전문경영인의 한계다. 오너 겸 창업자 2세가 따로 있는 이상 결정적 순간엔 약해진다. 성실한 공명
은 전문경영자의 분수를 철저히 지켰다. 




  공명이 북벌에 나서면서 2세 황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를 보면 공명의 애절한 심정이 잘 드러난다. 출사표는 공명의 굳은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철없는 유선에게 타이르는 충언이기도 하다. 공명은 출정하고 난 뒤 국사를 상의해야 할 사람들을 추천하고 황제로서의 근무 태도와 마음가짐을 간곡히 건의했다. 간신들을 멀리 할 것과 충신들을 가까이 둬 충언을 잘 듣도록 당부했다. 그 중에 궁중과 부중(府中)의 의견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점과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특히 강조했다. 공명의 출사표를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성도 무후사에 가면 송나라 충신 악비(岳飛)가 힘찬 필체로 쓴 출사표가 돌에 새겨져 있어 사람들을 숙연케 한다. 악비는 출사표를 울면서 썼다고 하는데, 줏대 없는 황제 밑에서 강적 금나라와 어려
운 전쟁을 해야 했던 자신의 처지와 겹쳐져 더 슬펐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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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명은 유선의 그릇과 역량 때문에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촉나라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을 벌인 위나라 조조의 후계자들에 비해선 많이 떨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조의 아들인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나 그 아들 명제는 어린 나이에도 결정적일 땐 뛰어난 자질을 보이면서 대세를 주도했다. 그러나 유선에겐 그런 황제다움이 없었다. 태평성대(太平聖代)라면 착한 황제가 될 수 있겠지만, 난세의 황제로선 아무래도 미흡했다. 유선은 환관의 말에 현혹돼 국정을 문란하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 전장에 나가 있는 공명을 소환하기도 했다. 공명은 전장을 떠날 형편이 아니었지만 황제의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대역죄가 되므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기도 했다. 그래도 유일한 위안은 유선이 공명을 신임하고 끝까지 권한을 맡긴 점이다. 이런 유선 밑에서 나라를 꾸려가려니 공명은 과로사(過勞死)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하가  "승상께서 모든 일을 다하려 노심초사하시니 건강이 걱정됩니다. 일을 나누어 맡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고 건의하자 공명은  "나도 그렇게 하고 싶으나 선주(先主)의 간곡한 유명(遺命)을 받은 터에 주군이 모든 것을 맡기시니
하나라도 소홀이 할 수가 없다" 고 실토했다 한다.




  공명이 오장원(五丈原)에서 마지막으로 위나라 사마의와 대치할 때의 일이다. 그땐 아무리 싸움터라도 군 사절(使節)들은 서로 오갔다. 촉나라 군사(軍使)가 위나라 진영에 갔을 때 사마의가 무심한 듯 묻는다.  "승상은 안녕하신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라고 하자 촉나라 군사는 밤늦게까지 일하시면서 식사는 조금밖에 하지 않으시니 걱정입니다" 라고 한다. 재차 사마의가  "그렇게 바쁜가?" 라고 하자, 촉의 군사는  "어버이 같이 군사들을 대하시어 태형 20대 이상은 직접 챙기십니다" 하고 말해버렸다. 군사가 돌아간 후 사마의는  "공명이 일은 많고 먹는 것이 적으니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
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촉나라 군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명의 건강에 대한 촉나라 최고 기밀을 실토했던 것이다. 그 뒤 사마의는 공명이 아무리 도발해도 응하지 않고 공명의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려 결국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 공명도 천하의 기재(奇才)였지만, 사마의도 그에 버금가는 준걸(俊傑)이었던 것이다. 유비나 공명이 불행했던 것은 조조나 사마의 같은 천하의 강적을 만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하늘의 뜻
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약한 황제 밑에 힘 있는 신하가 있으면 말이 많게 마련이다. 2세 황제 주변에선 공명 경계론이 많이 나왔었다. 공명에 대해서도 왕이 되라는 부추김이 있었다. 그러나 공명의 충성심이 한결같고 유선도 유비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공명이 죽자 부하 한 사람이  "강대한 병력을 가진 권신(權臣)이 이제 없어졌으니 폐하의 근심을 덜었다" 고 아첨 섞인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유선은 크게 화를 내며 당장 그 사람을 잡아다가 처형했다. 우유부단한 유선으로서는 대단한 결심이었는데, 그만큼 공명에게 의지했다는 뜻이 된다. 또 촉나라가 모두 공명 인맥인데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다간 앞으로의 나라 통치가 어렵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공명의 후임은 역시 공명이 추천한 장완(蔣琬)과 비의(費)가 연이어 맡았다. 군사는 애제자인 강유(姜維)가 맡아 북벌사업을 계속 이어
갔다. 공명은 가도 공명의 인맥이 촉나라를 계속 다스린 것이다.



  공명은 전문경영자의 한계를 실감하며 죽을 고생을 하다 생애를 마감했다 할 수 있다. 유비와의 첫 인연 때문에 공명은 뻔히 알면서도 가시밭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공명의 고달픈 운명에 눈물지으면서 위대한 경영자 유비의 통 큰 사후
 포석에 더욱 감탄하는 것이다.  


출처 :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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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오너 일가가 경영전반을 맡고 있는 체제죠.
그래서 그럴까요?
전문경영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글에 언뜻 비쳐 씁쓸합니다.
전문경영인이든, 오너든 간에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인데 저렇게 써야 했을까요? 물론 오너일가밑에서 일하는 전문경영인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맥락하에서 쓰였다면 이해하겠지만, 여기 나오는 의미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전문경영인 자체를 두고 폄하하는 듯 해서 안타깝네요.

참고로 전문경영인 체제하에서의 기업이 오너일가(가족기업)의 기업보다 훨씬 더 많을 뿐더러, 규모도 더 큽니다. 
포브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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