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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31) - 손권

손권의 능란한 외교술


유비 복수전 대비 수도 이전
조조에 아첨하며 신하 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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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성(湖北省) 당양(當陽)에 있는 관제묘(關帝廟). 관우의 머리 없이 조성한 무덤이다.















  관우를 잃은 유비의 복수전에 대비해 손권은 대내적인 준비는 물론 대외적으로 치밀한 외교전을 편다. 양쪽에서 싸우는 부담을 덜기 위해 위나라에 무릎을 꿇고 들어간다. 손권은 오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자존심쯤은 문제 삼지 않았다. 철저한 실리주의다. 어떤 땐 조조 편이 됐다가 어떤 땐 유비 편이 됐지만, 어느 쪽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국제 정세를 세심히 살펴 어부지리가 되는 방향으로 국책을 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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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권은 관우를 정벌하고 그토록 바라던 형주를 차지하고 나서 적극적인 인심 수습에 나섰다. 오랜 관리들을 그대로 쓰면서 전란에 시달린 백성을 달래기 위해 그 해 세금을 모두 감면했다. 또 번성 싸움에서 관우에게 사로잡혀 강릉옥에 갇혀 있던 위나라 대장 우금(于禁)과 부하들을 석방해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오나라 군사에 대한 대대적인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먼저 여몽을 상좌에 앉히고  "지난날 주유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무찔렀으나 요절하여 노숙이 그 뒤를 이었소. 노숙은 나에게 패업을 이루는 길을 일러 주고, 적벽대전 때 많은 사람이 항복하자고 했으나 단연 항전을 주장해 승리에 큰 공을 세웠소. 그러나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 주자고 한 것만은 잘못이오. 그 형주를 이번에 여몽이 되찾으니 노숙보다 나은 점이 있소" 하며 극찬했다.  섭섭한 것은 가슴 깊이 묻어 두고 큰 공에 대해선 확실한 칭찬과 보상을 하는 것이 손권의 특징이었다. 노숙이 살아 있을 땐 형주 일에 대해서 책망하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손권이 승리에 취해 있을 때 원로 장소(張昭)가 찾아와 나라의 위기가 눈앞에 닥쳤다고 일깨워 줬다. 관우가 기습을 당해 죽은 데다 형주 땅을 송두리째 뺏겼으니 촉나라 유비가 복수하러 올 것이라는 얘기였다. 촉나라가 쳐들어오면 기회를 노리고 있는 위나라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잘못하면 오나라는 양쪽에서 협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손권은 회의 끝에 이번 관우 정벌을 위나라의 책임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러려면 손권이 위나라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손권은 관우의 머리를 낙양에 있는 조조에게 보내면서 깍듯이 신하의 예를 차렸다. 그리고 머리 없는 관우의 시신을 당양(當陽)에 정중히 묻어 줬다. 관우의 머리를 받은 위나라 조조는 손권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나, 향나무로 몸을 깎아 맞춰 낙양성 남문 밖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유비에 대한 배려도 있었지만 조조 자신이 관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호북성(湖北省) 당양엔 머리 없는 관제묘(關帝廟)가 있고, 하남성(河南省) 낙양 남문 밖엔 몸뚱이 없는 관림(關林)이 있다. 관우는 유비에겐 절개를 지키고 충성을 다했으나 요충지 형주를 잃음으로써 유비의 천하 전략엔 큰 차질을 초래했다. 한중과 형주 양쪽에서 중원을 공략하려던 대전략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때 형주를 잃은 후 유비는 다시 형주 땅을 밟지 못한다. 조조도 손권과 관우를 싸우게 해 형주 땅을 일부나마 차지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최대의 실리를 취한 사람은 손권인데 이를 잘 보전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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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은 유비의 복수전에 대비해 대내적인 준비는 물론 대외적으로 치밀한 외교전을 편다. 양쪽에서 싸우는 부담을 덜기 위해 우선 위나라에 무릎을 꿇고 들어간다. 손권은 조조에게 사신을 보내 신하를 자처하면서 지금 천하가 모두 바라고 있으니 새 왕조를 세워 천자가 되라고 간곡히 청한다. 그러면 손권은 영토를 바치고 신하를 이끌고 항복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조는 "이 사람이 나를 뜨거운 화로 위로 올라가라고 하는구나" 하고 웃어넘겼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권은 오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자존심쯤은 문제 삼지 않았다. 철저한 실리주의다.  어떤 땐 조조 편이 됐다가 어떤 땐 유비 편이 됐지만 어느 쪽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국제 정세를 세심히 살펴 어부지리가 되는 방향으로 국책을 펴 갔다. 이런 줄타기 외교를 하려면 국내 기반이 튼튼하고 리더십이 확고해야 한다. 손권은 뛰어난 선견력과 평소의 감성 리더십을 통해 신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확고한 신뢰를 얻었다. 손권은 성격이 활달하고 거친 면이 있었지만, 평소 신하들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형주 탈환이 끝난 후 여몽에 대한 대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손권은 여몽을 남군태수(南郡太守)에 봉하고 돈 1억 전과 황금 500금을 하사했다. 여몽이 받지 않으려 하자 손권은 사양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그 후 얼마 안 돼 여몽이 병석에 누웠다.


 
소설 삼국지에선 형주 탈환의 논공행상을 하던 날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손권을 야단치며 죽는 것으로 돼 있지만 사실은 병사한 것이다. 젊을 때부터 전장을 떠돈 여몽은 말년에 몸이 좋지 않았는데, 대망의 형주 탈환에 마지막 에너지를 다 쏟은 듯 한창 나이에 타계했다. 공교롭게도 초창기 오나라를 지탱한 군의 기둥들이 대부분 젊어서 서거했다. 주유는 36세, 노숙은 46세, 여몽은 42세였다. 처음 여몽이 병이 나자 손권이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다. 그때 손권은 공안(公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여몽을 자기 거처로 불러 정양(靜養)하게 하고 돈 1,000금을 내걸고 여몽의 병을 고칠 명의를 찾았다. 아침저녁으로 병세를 물어봄은 물론 직접 문병하면 여몽이 신경 쓸까 봐 벽에 구멍을 뚫어 놓고 병세를 관찰했다 한다. 여몽이 식욕이 없어 음식을 못 들면 매우 걱정하고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토록 좋아했다. 중도에 여몽의 병이 회복세를 보이자 손권은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축하할 정도였다. 다시 중태에 빠지자 용한 도사(道士)를 불러 수명 연장을 빌었다.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여몽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손권은 며칠을 통곡하면서 가무음곡을 금하고 식사를 줄였다 한다. 여몽은 죽으면서 손권으로부터 받은 돈과 선물을 모두 봉해서 군자금으로 쓰도록 손권에게 다시 바치고 자신의 장의는 간소하게 하도록 당부했다. 손권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슬퍼했다 한다. 이 같은 군신 간 아름다운 정의가 오나라를 훌륭히 번성시킨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은 역시 명 CEO 손권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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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도 관우의 장례식 후 노환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66세로 생을 마감했다. 조조 사후 큰아들 조비가 뒤를 이었는데 바로 위 문제(文帝)다. 손권은 조비에 대해서도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손권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지금은 촉나라의 복수전에 대비해 위나라와 한편이 된 것뿐이고 얼마 안가 적대 관계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권의 아들을 인질로 낙양에 보내라는 위나라의 요구를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룬다. 그 과정에서 손권은 박진감 있는 연극도 사양하지 않는다. 한 번은 위나라 사신이 왔을 때 아들이 아직 나이가 어려 어버이 마음에 멀리 보내기가 어렵다면서 눈물을 보이고는 좀더 장성하면 반드시 보내겠다고 하늘을 두고 맹서했다. 위나라 사신은 이를 그대로 믿고 본국에 돌아가 손권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복명했다.  그러나 손권은 아들을 보낼 의사가 애초 없었고 끝까지 보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손권은 위나라에 결정적으로 책잡힐 짓은 하지 않는다. 촉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위나라도 손권을 달래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그 역학 관계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조비가 아버지 조조는 차마 못했던 한나라 찬탈을 단행해 천자를 내쫓고 스스로 황제가 됐을 때도 맨 먼저 축하 사절을 보내 충성을 맹서한다. 촉나라의 유비가 아직 준비가 안 돼 가만 있지만 언젠가는 쳐들어올 것이므로 그때까지는 위나라와 제휴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유능한 사신을 계속 보내 조비의 비위를 맞추면서 국제 정세를 살폈다. 조비가 황제가 되자 대항이라도 하듯 촉나라 유비도 제위에 올랐다. 한나라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하는 유비로서는 한나라 황제가 없어졌으니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야 명분에도 맞다. 그러나 손권은 그런 명분에서 자유로웠다. 조비가 손권에게 오왕(吳王)의 칭호를 주자 일부 신하들은 왕위를 받지 말고 차라리 대장군 구주백(九州伯)이란 이름을 달고 독립하자고 주장한다. 신하 중엔 왕위를 받으려 한다고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손권은 "그까짓 이름이 무슨 대수냐. 옛날 한고조 유방도 한때 항우(項羽)로부터 한중왕(漢中王)의 칭호를 받았지만 나중에 항우를 쳐부수고 황제가 되지 않았느냐" 면서 오왕 칭호를 받았다. 또 위나라에서 상아•공작•물소 뿔 등 남방의 희귀한 물건들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했을 때도 신하들은 전례가 없던 일이니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손권은 그런 물건들은 돌이나 기왓장 같은 하잘 것 없는 것들이니 전부 보내 주라고 명령했다. 큰 이익을 위해서 작은 수치는 참은 것이다. 사실 이때 위나라에서도 의논이 분분했다. 손권이 신하가 되겠다고 청하자 이를 받지 말고 오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손권이 다급해서 그런 것인즉 이참에 아예 오나라를 정벌해 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조비는 대국을 볼 줄 알았다. 겉으로는 "신하가 되겠다고 항복하러 오는 사람을 안 받아 주면 누가 항복하러 오겠느냐. 손권의 항복을 받아 천하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고 했지만, 실제로는 손권과 유비를 싸우게 해 남는 나라를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비로선 자신의 즉위에 대항하는 유비보다 신하를 자처하는 손권이 더 좋았을 것이다. 손권이 황제가 된 것은 조비보다 9년, 유비보다 8년이나 뒤다.


 
손권은 조비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만약의 사태엔 철저히 대비했다. 또 위나라가 경시하거나 넘보지 못하게 했다. 이런 손권의 국정 철학은 오나라 사신들에 의해 위나라에 충분히 전달됐다. 한번은 오나라 사신 조자(趙咨)가 위나라에 갔을 때 위 문제가 물었다.  "손권은 어떤 인물인가."  "우리 주공은 총명(聰)과 밝음(明)과 어짐(仁)과 지혜(智)와 웅대함(雄)과 지략(略)을 두루 갖춘 분입니다. 노숙을 평민에서 발탁했으니 총명함이고, 여몽을 병졸에서 키웠으니 밝음이며, 위나라 포로 우금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으니 어짐이며, 형주를 무혈 점령한 것은 지혜이고, 강남의 3개주( 형주, 양주, 교주 )를 차지해 천하를 노리니 그것은 웅대함이고, 지금 폐하의 신하를 자처하는 것은 지략입니다" 하고 답했다 한다.
조비가 또 물었다.  "지금 우리 위나라가 오나라를 정벌할 수 있다고 보는가. 오나라는 방어할 힘이 있는가."   "대국에 정벌군이 있으면 소국엔 방어군이 있는 법입니다. 지금 오나라엔 백만의 무장병과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란 천연요해가 있으니 쉽게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위 문제는 감탄해  "과연 훌륭하도다. 당신 같은 인재가 오나라엔 얼마나 있는가" 하고 물은즉 "특히 뛰어난 인물은 80 ~ 90명, 저 같은 사람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조자는 귀국해 손권에게 "위나라는 지금의 동맹 관계를 오래 유지할 의지가 없어 보이니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고 복명했다.


 
위나라는 오나라를 여러 가지로 시험했다. 다른 사신이 갔을 때 위 문제가 물었다. "오나라는 위나라를 믿고 우리가 정벌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물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벌군을 보낼 경우도 생각해 대비책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조비는 할 말을 잃었다 한다. 그 사신은 돌아와 손권에게 위나라가 아무래도 쳐들어올 것 같다면서 틀림없이 안보하는 길은 "상대방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쳐들어올 수 없도록 준비하는 것" 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군사 시설과 군장비를 정비하고 병사와 인민들을 다독이며 군간부들의 마음을 잡아 놓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손권도 군간부들에 대한 지시 각서를 통해 "지금 전쟁이 없다고 결코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요즘 군간부들이 호위병 없이 그냥 외출하는데 자신의 몸이 나라의 소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하라. 자신을 함부로 다뤄 가족과 나를 근심하게 하면 그것이 바로 불충" 이라고 엄히 경고했다.  이때가 손권으로선 매우 위기였다. 촉나라 유비가 쳐들어오는 것은 당장 문제고, 위나라 조비와는 다소 시간이 있으니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손권은 유비의 복수전에 대한 대비책으로 도읍을 장강 중류 쪽으로 옮겼다. 건업(建業•현 남경)에서 악주(鄂州)로 옮기면서 무창(武昌)이라 불렀다. 유비가 쳐들어오면 장강을 타고 내려올 것이므로 서쪽으로 방위선을 이동한 것이다. 손권은 수도도 기동적으로 옮겼는데, 이름이나 명분에 집착하지 않은 손권의 실용주의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 회계(會稽)에서 시작했다가 다음 오군(吳郡)•경구(京口)•건업•무창•건업 등으로 필요에 따라 기동적으로 옮겨갔다. 기마민족이 전략적으로 초원을 누비듯 장강을 무대로 근거지를 수시로 옮긴 것이다. 적벽대전 전에는 시상(柴桑)에 주둔해 있었고, 형주 탈환 전후엔 공안에 있었다.



 
손권이 도읍을 옮긴 바로 그 해 유비가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왔다. 손권은 전쟁을 피해보려 애를 많이 썼다. 촉나라와 오나라가 싸우면 둘 다 어려워지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손권의 입장에서 보면 형주 탈환은 빌려 준 것을 돌려받은 것일 뿐, 위나라란 큰 적을 앞에 두고 유비가 오나라에 쳐들어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비의 입장에선 관우를 기습 공격해 죽인 데다, 의동생 장비를 죽인 범인까지 오나라로 달아났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대의보다 눈앞의 분노가 앞섰던 것이다. 또 형주는 천하통일을 위해 반드시 찾아야 할 땅이었다. 유비가 백제성까지 진주해 왔을 때 제갈근이 특사로 간다. 유비를 만난 제갈근은 큰 적은 위나라 조비이니 작은 분노를 거두라고 거듭 간청한다. 그리고 관우를 죽인 것은 손권의 뜻이 아니라 현지 사령관 여몽이 한 일이라고 변명하고, 두 나라가 싸우면 공동의 적인 위나라만 어부지리를 취하게 된다고 설득한다. 그러나 유비에게 그런 대의나 논리가 통할 형편이 아니었다. 최후의 외교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손권은 결전을 준비한다. 드디어 촉•오 두 나라가 숙적 위나라를 그대로 둔 채 운명을 건 결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유명한 이릉대전(夷陵大戰)이다.



출처 :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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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삼국지 경영학 손권편도 막바지에 이르릅니다. 최우석님의 삼국지 경영학을 포브스 정기구독을 통해 만나본 후 흠뻑 빠져들었고, 다른 블로거분들도 접해 보시라고 부득이 글로 옮겼는데, 이제 단행본도 나왔고 저도 귀찮은 면도 있고 그만해볼까 합니다. 그래도 손권편까지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겠습니다. 후후~
삼국지 경영학은 손권편을 끝으로 3명의 CEO 편이 끝납니다. 후속으로 삼국지 기행이라고 해서 중국 현지를 찾아가 방문답사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있는데 그때는 제가 정기구독을 그만 둔 후라서 못 올려 드립니다. ^^

꼭 읽어보시고 싶은 분은 포브스 과월호를 참조하세요. 오늘 주말인데 저녁 즈음에 친구랑 술이나 한 잔 마셔야겠어요. 너무 덥다보니 맥주 생각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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