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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dith Piaf - Non, Je Ne REgrette Rien


뮤지션 : Edith Piaf

곡 : Non, Je Ne REgrette Rien

  요즘 굉장히 더운 날입니다. 내일부터 장맛비가 온다고 하니 더위가 한층 가시겠지요. 더운 날에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까 고민을 해 봤습니다. 신나는 댄스곡을 포스팅할까 하다가 나른한 감도 있고 해서 샹송을 준비해 봤습니다. 프랑스 샹송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수는 에디트 피아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를 대신해 올립니다. 한동안 제 MP3플레이어와 미니홈피를 수놓은 음악입니다. 핸드폰 컬러링으로도 한참 애용했는데  전부 다 당장 바꾸라고 성화를 해서 핸드폰에서 자취를 감췄지요. 어찌되었든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여가수의 곡을 감상해 보세요.

저는 좀 있다 저녁에 축구 보러 가야겠습니다. ㅎㅎ!! 천안에서 열렸으니 뭐.. 가 봐야죠^^


음악 : Edith Piaf - Non, Je Ne REgrette R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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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h Piaf
 
본명 : Édith Giovanna Gassion

1915년 12월 19일 출생.  파리 벨 베이르 72번가 길 위.
서커스단의 곡예사였던 아버지와 이태리 출신의 3류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가 태어납니다. 자선 병원으로 가던 도중에 일어난 일이죠. 그녀가 태어났던 곳은 그야말로 도시의 빈민가, 혹은 사창가였습니다. 태생이 굉장히 불운했어요. 그 뿐 아니라 어머니는 2달만에 종적을 감추고, 아버지 역시 그녀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딸의 이름을 짓는데, 그것도 굉장히 안 좋게 짓습니다. Edith Cavell은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 군인 도주를 몰래 도왔던 영국인 간호사죠. 그게 발각이 되어 독일군에 의해 사살됩니다. 그녀의 부모는 바로 그 이름을 따서 짓습니다.

1918년 3살 결막염으로 시력 상실.  다시 회복.


1929년  14살 서커스단에 있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 길거리 가수로 삶을 연명.


1931년  16살 배달부 청년과 사랑에 빠져 딸을 낳지만 이내 뇌막염으로 사망.


1935년  20살 루이 르플레(Louis Leplee)의 눈에 띔.  Gemy라는 술집을 운영하던  그는 그녀가 갖고 있는 기구한 사연과 편력들이 대중들에게 먹힐 것이라 판단을 하고 그녀를 무대에 세웁니다. 그녀의 새로운 이름, Piaf를 지어준 것도 바로 루이 르플레였습니다.  당대의 작곡가였던 레이몽 아소 ( Ramond Asso )나 모리스 슈발리에 ( Maurice Chevalier ) 등을 만나 노래를 다듬고 예술가의 삶을 닦기 시작합니다.


1937년 Mon Legionnaire  첫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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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세르당


1947년 [ La Vie En Rose ] 발매.
이브 몽땅과 연인이었을 당시 그녀가 직접 작사한 곡입니다. 그녀하면 일단 파란만장한 인생과 더불어 수많은 염문이 떠오르죠. 이브 몽땅( Yves Montand ), 장 콕토( Jean Cocteau ), 조르주 무스타키( Georges Moustaki ), 샤를 아즈나부르( Charles Aznavour ), 테오 사라포( Theo Sarapo ), 자끄 필스( Jacques Pills ) 등등이 있겠네요.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말하는 데 늘 빠지지 않는 그들은 대부분 음악가 아니면 시인들이었습니다. 어려서 불운한 경우를 많이 겪어선지 그녀는 사랑을 쉽게 탐닉하곤 했죠.  에디트 피아프는 동년 미국 공연 때 유럽 헤비급 챔피언인 마르셀 세르당( Marcel Cerdan )을 만납니다. 그리고 서로가 불같은 사랑에 빠지죠. 하지만 서로가 가수와 복서로 바쁜 나날을 보내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빌어먹을!! 저는 솔로라서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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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뉴욕에서 공연중이던 피아프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세르당에게 빨리 와줄 것을 간청합니다. 당연히 서로가 죽고 못 사는데 마르셀 세르당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연인이 있는 뉴욕으로 향하죠. 하지만 그 위에서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운명의 여신은 세르당을 대서양 중부 아조레스 제도의 로돈타 산봉우리에 추락사시키고 맙니다.


1950년 사랑의 찬가 [ Hymne a l'amour ] 발매.
일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연인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오열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다지고 자신을 찾아오다 죽은 연인을 위해 노래를 하죠. 세르당을  향한 못다한 사랑과 슬픔을 담은 노래 Hymne a l'amour 그렇게 탄생합니다.
그녀가 가사를 직접 쓰고  여류 작곡가 마그리트 모노가 곡을 붙여 발표되면서 이 곡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이 곡은 나중에 포스팅하겠습니다.


1951년 교통사고.


1952년 자끄 필스( Jacques Pills )와 결혼.
             내 안에 있는 너 Je T'ai Dans La Peau
             하룻밤의 연인 Les Amants D'un Jour
             오토바이를 탄 남자 L'Homme A La Moto 녹음.


1956년  내일의 연인들 [ Les Amants De Demain ]
              파리의 노래 [ Paris Chante Toujours ] 
              아름다운 백합 [ La Petit Lili ] 영화 출연


1959년 마차의 신사 [ Milord ] 호반응으로 인해 투어 증가.
             조르주 무스타키( Georges Moustaki ) 작곡.


1960년 난 후회하지 않아요 [ Non, Je Ne Regrette Rien ] 발매.
            샤를 드몽 ( Charles Dumont )의 곡.
            <파니 핑크>에 삽입.


1962년 그리스 태생 테오 사라포( Theo Sarapo )와 결혼.
            사랑이 무슨 소용인가 [ A Quoi Ca Sert L'Amour ] 발매.


1963년 10월 11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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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장례 미사는 로마 카돌릭 대주교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 때문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찌되었든 그녀를 추모하는 장례행렬은 무려 4만명이 넘어,  2차세계대전 이후 단 한 번, 파리의 교통이 완전히 정체되는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바이오그래피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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