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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11) - 조조

 포석 아래 끝까지 직접 챙겨

아들들 경쟁시켜 후계자 낙점
 


근성의 조조…  치밀한 승계 전략 


  위대한 경영자들의 공통점은 끝없는 에너지와 집념이다. 작은 성공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한다. 탐욕스러울 정도로 욕심도 많고 집념도 강하다. 보통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다. 성격도 괴팍스럽고 강렬하다. 원대한 목표를 위해선 사소한 인정이나 관습, 명분에 구애받지 않는다. 밖에서도 엄격하지만 집안을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팎으로 긴장을 풀지 않고 끝까지 챙기는 것이다.  일단 창업의 기반이 다져지면 지배 시스템을 구축하고 1인 체제를 강화해 나간다. 여기에 장애가 되는 것은 가차없이 제거해 버린다. 스스로의 절대성 확보와 후계 구도를 위한 준비 단계라 할 수 있다. 조조는 그 과정을 냉철하게 처리해 독재체제 구축과 후계자 승계작업을 잘 끝냈다. 물론 희생자도 나왔다. 조조에겐 제일의 창업공신이라 할 수 있는 순욱(荀彧)도 죽임을 당했다. 조조는 조씨 왕국을 세워 자손만대로
물려주고자 하는 데 순욱이 장애가 되니 눈 딱 감고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다음 천하의 명사로 이름 높은 공융(孔融)도 크게 높아진 조조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옛날식으로 대하자 처단해 버린다. 순욱과 공융을 처단할 정도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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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로선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가장 힘겨운 싸움을 한 것은 원소(袁紹)와의 관도대전(官渡大戰)이었다. 조조가 45세 한창 때였는데 그야말로 전심전력을 다해 기적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5년간 고삐를 늦추지 않고 원소의 잔당을 추적하고 섬멸해 하북(河北) 일대를 완전히 평정했다.  관도대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조조의 어릴 적 친구이기도 한 허유(許攸)였다. 원소의 도읍지인 업성(城)을 점거하고 나니 허유의 콧대가 너무 높아져 말끝마다 자기 공을 자랑하고 다녔다. 조조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겉으로 나타내진 않았다. 한 번은 허유가 업성의 동문 앞에서 조조의 호위대장 격인 허저(許)를 만났다. 허유가 우쭐대면서 “내가 아니었으면 너희가 감히 이 문을 드나들 수 있었겠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골수 군인인 허저가 이 말을 그냥 넘길 리가 없다.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워 뺏은 것이지 왜 당신 공이냐”고 시비가 붙었다. 허유가 계속 건방지게 굴자 허저는 단칼에 허유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는 조조에게 사죄하러 갔다. 조조도 겉으론 야단을 쳤지만 허저를 용서했다. 허저로서는 조조의 마음을 읽고
 일을 저지른 것인지 모른다.


  비슷한 때에 조조 밑에서 공을 많이 세운 누규(婁圭)나 최염(崔琰)도 죽임을 당한다. 최염은 일도 잘하고 명망이 있었다. 애초 원소 밑에 있었으나 조조가 거두어 측근으로 썼다. 풍채가 아주 좋아 공식 행사에서 더러 조조 대행을 했다. 한 번은 북쪽 흉노 땅에서 사신이 왔는데 최염이 대신 조조 자리에 앉고 조조는 신하처럼 옆에 시립해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그 사신에게 오늘 대왕의 모습이 어떻더냐고 물어보았더니 “대왕님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 시립해 있는 분은 진짜 영웅의 기상이었습니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를 전해들은 조조는 뒤쫓아가서 그 사신을 죽여 버렸다 한다. 변장하고 참석한 자기를 간파한 그 사신이 기분 나빴던 것이다. 그 최염이 조조의 독재화 과정에 방해가 되자 가차없이 없애 버린다. 최염이 추천해 관리가 된 사람이 조조의 공적을 극찬하는 글을 올리려는 것을 너무 그렇게 할 것 없다고 말린 것이 죄목이었다.   그 즈음에 조조는 승상이 되어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다. 53세 때다. 큰일을 하기에 심신이 최고 상태였다. 현대 경영에서도 50대 전반을 CEO들의 최적기로 보고 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CEO의 격무를 감당할 수 있고 경륜도 그만큼 갖출 나이라는 것이다. 훌륭한 40대 CEO가 없는 것은 아니나 아무래도 경륜이 조금 부족하고, 60대에 들어서면 조심성이 너무 많아 패기와 도전심이 떨어진다. 물론 예외도 많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나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70대에도 새 사업을 벌이는 등 적극적 도전과 모험을 했다. 이병철 회장이 사운을 걸고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을 벌인 것은 73세 때다. 정주영 회장은 75세 때 대북사업을 위해 1차 방북을 한다.  



  지금과 달리 삼국시대에는 평균수명이 짧아 60세를 넘기기 어려웠는데 조조는 65세까지 살면서 정력적으로 전장을 누빈다. 60대 초반까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한중(漢中)의 장로(張魯), 강동의 손권과 싸움을 벌였다. 한중을 놓고 촉나라 유비와 혈전을 벌인 것이 죽기 한 해 전인 64세 때였다. 감탄할 만한 에너지와 집념이다.  조조는 55세 때 유명한 구현령(求賢令)과 술지령(述志令)을 반포한다. 구현령은 과거나 행실을 묻지 말고 천하의 인재를 발굴하라는 것이다. 이때까지도 조조는 가뭄에 단비를 구하듯 좋은 사람들을 구하고 모았다. 술지령은 조조가 천자로부터 받은 영지의 일부를 반환하면서 자신의 심정과 정치적 포부를 밝힌 것인데 권력의 절정기에 오른 긍지와 자부심이 배어 있다. 조조는 "어릴 적 꿈은 한 지방의 태수가 되어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것이었다. 좀 더 장성해서는 나라의 큰 도적들을 물리쳐 정서장군(征西將軍)쯤 되었으면 했다. 한때 나는 원소와 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끝내 원소를 격파하고 북방을 평정했다. 남쪽으론 형주의 유표를 정복하고 강동의 손권을 정벌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승상이 되었고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만약 이 조조가 없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황제나 왕을 자칭했겠는가. 나의 세력이 강대해도 황제를 찬탈하거나 세상을 어지럽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권력과 군사들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쉬지 못하는 것은 천하가 다시 혼란에 빠지고 나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상직에서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나 영지는 과분하므로 되돌리려 한다" 고 적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조의 속마음은 어떻든 한나라 황실을 찬탈할 때가 아니라고 본 것 같다. 냉철한 전략가인 조조가 천하의 인심을 어찌 모르겠는가.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한나라 황실에 대한 관습적인 존경심은 남아있었고, 환관의 후예인 조조가 황제가 되는 데는 저항감이 거세리라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 긴 포석을 한다. 또 50대 후반부터 후계구도를 준비하는 데 그 작업도 치밀하고 빈틈없다. 끝까지 하나하나를 챙긴다. 먼저 장남 조비(曹丕)를 부승상격인 오관중랑장으로 올리고 자식들에게도 제후(諸侯) 벼슬을 준다. 58세 때엔 자신이 승상보다 높은 위공(魏公)에 오르고 3년 뒤엔 위왕(魏王)이 된다. 한나라 승상에서 위나라의 왕이 된 것이다. 스스로 위나라를 개국해 독자적인 사직(社稷)과 조정을 가진 것이다. 이때 이미 권세는 황제보다 강했다. 조조의 권세가 너무 커지자 황후를 중심으로 조조 암살기도가 있었지만 곧 평정되고 만다. 벌써 천하의 인심이 한나라를 떠나 새 시대를 요구했던 것이다.  


  위왕 때 조조는 이미 천자의 깃발과 수레를 썼다. 또 후계자 조비를 태자로 삼는다.  태자를 선정하는 과정도 역시 조조답다. 장남이라고 그냥 앉힌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한 후 선정한 것이다. 조조는 후계자 선정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조조에겐 모두 25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조앙(曹昻)인데 유(劉)씨 부인의 소생이었다. 유씨 부인이 일찍 세상을 뜨자 첫 정실인 정(丁)씨 부인이 길렀다. 조앙은 서장자(庶長子)지만 정씨 부인이 아들이 없어 친자식같이 길렀다. 인품도 훌륭해 조조의 맏아들 노릇을 훌륭히 했다. 그러나 조조가 38세 때 장수(張繡)를 정벌하는 길에 동행했다가 전장에서 죽고 만다. 그때 조조군이 기습공격을 받았는데 조앙은 자기 말을 조조에게 바치고 맨몸으로 탈출하다 전사했다. 이때 조비도 같이 갔다가 탈출했는데 조비가 후에 위나라 황제가 되었으니 높은 팔자는 하늘에서 타고나는 것인가 보다.  



 
정씨 부인은 사랑하는 아들이 조조 때문에 죽었다 하여 굉장히 화를 내고 친정으로 가 버렸다. 조조는 기녀 출신인 변(卞)씨를 정실로 맞았고 여기서 비를 낳았다. 변씨는 현명한 부인으로 전쟁으로, 정치로 몹시 바쁜 조조를 조용히 돕고 집안을 잘 다스려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한다. 조조는 처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집안에선 무척 검소하고 아이들 교육에 힘썼는데 변씨 부인의 내조의 공이 컸다. 조조는 부인을 아꼈지만 친인척이 발호하거나 바깥일에 간여하는 것을 철저히 금했다. 그리고 능력에 따라서만 자리를 주었다. 변씨 부인의 동생에게 벼슬을 주고 오래 승진을 시키지 않자 불만이란 소문을 듣고는 “네가 내 처남이라는 이유로 벼슬을 높여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벼슬을 주어야 하냐”고 호통을 쳤다 한다.  


 
여러 아들 가운데 조조가 가장 총애한 아들은 서자인 충(沖)이었다. 충은 매우 총명해 조조가 매우 사랑하고 기대도 컸다. 충은 아래 사람들도 잘 보살펴 덕망이 높았다. 그러나 조충은 13세에 병사하고 만다. 조조가 크게 애통해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식들이 위로하자 조조는 “충이 죽은 것은 나에게는 불행이지만 너희에겐 행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다. 조조는 충을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는데 충이 죽었으니 너희도 기회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조는 후계자를 빨리 선정하지 않고 심사숙고한다. 가장 유력한 아들은 장남인 비와 삼남 식이었다. 둘째 창은 학문엔 뜻이 없고 무예만 열심히 닦았다. 장차 훌륭한 장수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조조도 처음엔 학문을 권하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 그러나 조조는 자식들을 치열하게 단련시켰다. 조조의 능력주의가 자식들에게도 적용됐다. 창이 북방의 오환족(烏丸族)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갈 때였다. 조조는 아들에게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으나 임무를 맡았으니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되었다. 모든 것을 왕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니 너는 그 점을 명심하라”고 준엄하게 당부했다 한다.  


  조창이 후계자에 뜻이 없으니 자연 장남 비와 삼남 식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비도 학문을 잘하고 글에 뛰어났지만 식이 한 수 위였다. 식의 글 솜씨는 조조도 감탄할 정도였다. 한때는 조조의 생각도 식에게 기울어졌다. 그러나 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므로 조조도 선뜻 정할 수가 없었다. 정치적 재능이나 덕성은 비가 위였다. 조조의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 신하들도 갈렸다. 비의 편엔 가후(賈), 사마의(司馬懿) 등 원로들이 많았고, 식의 편엔 양수(楊修) 등 젊은 문인들이 많았다.  



  조조는 두 사람을 여러 가지로 시험한다. 한 번은 두 사람에게 왕명으로 심부름을 보내고는 궁성 책임자에게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지시한다. 비는 원로들의 자문을 들어 그대로 돌아온다. 그러나 식은 왕명으로 가는데 누가 막느냐면서 책임자의 목을 베고 나간다. 조조는 조비가 그냥 돌아온 것도 불만이지만 관리의 목을 함부로 베는 것은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인명을 경시해서 어떻게 만백성을 다스리겠느냐는 것이다. 또 한 번은 조조가 전장에 나가게 되었다. 조식은 좋은 문장으로 구구절절이 애틋한 정을 표했다. 그러나 비는 단지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원로들의 코치였다. 조조는 그래도 장남이 더 진실하고 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천재적 시인이었던 식은 생활이 자유분방했다. 어떨 땐 수레를 몰고 천자만이 다니는 궁성 문을 나가 책임자가 목이 날아가기도 했다. 조조의 마음이 점차 식에게서 멀어지는 데 식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남방정벌군 사령관으로 임명돼 급히 떠나야 하는데 술에 너무 취해 출정식에도 참석 못한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가 겹쳐 조조는 식에게 기울어지는 정을 누르고 성실한 조비를 후계자로 최종 결정한다. 조조의 냉철함과 완벽추구가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비를 고른 것은 위나라를 위해서나 천하를 위해서나 매우 성공적인 결단이었다.  



출처 :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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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픽 정말 말썽입니다.
방문자수가 100도 안 넘어가는데 트래픽 초과라서 저도 못 들어가는 신세니..!!
동영상이래봐야 2-3개밖에 없는데 연유를 모르겠네요. 트래픽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미리미리 워드에 적어 놓고 옮기기만 하면 되니 정말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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