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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13) - 유비

큰 그릇의 CEO 유비


어진 인품으로 大器晩成 창업

人才 보듬는 넉넉한 가슴도


  삼국지의 세 주인공 조조 ·손권 ·유비 중 유비만큼 불가사의한 인물도 없다. 물려받은 유산이 대단했던 것도 아니고 전란 때 큰 자산인 무용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다. 또 집안이 좋거나 일족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일어나 천하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한낱 시골의 협객으로 있다가 20대에 처음 군사를 일으키지만 40대 후반까지 변변한 근거지를 마련치 못하고 천하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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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는 맨 처음 공손찬(公孫瓚)에서 시작해
도겸(陶謙) ·여포(呂布) ·조조(曹操) ·원소(袁紹) ·유포(劉表) ·손권(孫權) 등의 신세를 졌다.  신기한 점은 신세를 지면서도 상대방이 매우 무겁게 대했다는 것. 오히려 신세를 베푸는 쪽에서 더 못해줘 야단을 하고 애써 붙잡아두려 했다. 세력에 비해 명성이 높아 군웅들이 유비와 다투어 사귀고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다. 브랜드 이미지가 매우 높은 경영자였다. 유씨로서 황족이라는 후광도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유비 스스로 쌓아올린 명망이 절대적이었다.   정사 삼국지를 보면  “유비는 키가 7척5촌(약 1m80㎝)이고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까지 닿았다. 게다가 귀가 커서 눈을 돌려 자기 귀를 볼 수 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실력자 조조는 유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 했다. 유비가 곤궁한 신세가 되어 자기 진영에 와 있을 때도 늘 상객 대우를 해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상석에 앉았다 한다. 또 군웅들 가운데에서 진정한 영웅은 조조 자신과 유비밖에 없다면서 한몫 놓아주었다. 여포는 당시 자기 이익에 따라 수시로 주인을 바꾼 매우 의리 없는 사람이었는데 유비에게만은 호의를 보이고 잘해줬다.  


  유비는 오랫동안 근거를 못 잡고 뿌리 없이 부평초처럼 떠돌았지만 다른 군웅들이 다 멸망한 뒤에도 조조 ·손권 더불어 셋만 남아 삼국정립시대를 열었다. 여러 군웅 사이를 떠돌며 필요에 따라 배신조차 했는데 늘 점잖고 훌륭한 사람으로 대접받았다. 본인도 늘 인의(仁義)를 입버릇처럼 뇌고 지금도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인의군자(仁義君子)로 평가받는다.



  유비를 한 번 보면 대개 그의 인품에 반한다.  유비가 그토록 궁핍하게 지낼 때도 천하의 인재들이 유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형제를 맺고 생사고락을 같이하기로 한 관우(關羽) ·장비(張飛)는 말할 것도 없고 조자룡(趙子龍) ·제갈공명(諸葛孔明) ·법정(法正) 등 당시 초일류 인재들이 모두 유비가 별 볼일 없을 때 모인 사람들이다.  이상과 원칙을 따지는 바른 선비에서부터 책략과 패도(覇道)를 서슴지 않는 책사(策士)에 이르기까지 청탁불문(淸濁不問)하고 모여들었다. 이들이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갔더라면 파격적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초일류 대기업을 마다하고 유비라는 CEO만 보고 장래를 알 수 없는 벤처기업에 몸을 던진 격이다.



 당시는 좋은 주인과 좋은 대우를 찾아 인재들의 이합집산이 심할 때인데도 유비에게 한 번 온 사람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개성이 독특한 이들을 잘 달래 조화를 이루고 상승에너지를 내게 하는 유비의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다. 타고난 리더십이요, 인간적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CEO는 이런 천성이 필수적이며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인간적 매력 없이는 결코 위대한 업적을 낼 수가 없다. 흔히 조조는 천시(天時)를, 손권은 지리(地利)를, 유비는 인화(人和)를 얻었다고 말한다. 조조는 타고난 영명함으로 천하대세를 잘 읽어 편승했고, 손권은 물려받은 강동(江東)의 천험(天險)을 적절히 살려 수성을 잘했으며, 유비는 아무 가진 것 없이 인재를 잘 써 큰일을 했다는 비유일 것이다. 조조나 손권에겐 총명함이나 결단과 아울러 냉혹함이 느껴지는 반면 유비에겐 따뜻함이 있다. 유비는 어떤 땐 공사가 불분명할 정도로 정(情)에 끌리는 경우가 많다. 정이 많은 정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조조가 법가적(法家的) 엄격함으로 철저한 능력주의를 채택한 데 비해 유비는 인정과 의리로 뭉친 무리라 할 수 있다. 유비는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 끝까지 같이 갔다. 세력이 보잘 것 없을 때나 촉나라의 황제가 됐을 때나 한결같았다. 대개 지위가 높아지면 옛날 사람이 불편해지는 법인데 유비에겐 그런 게 없다. 제갈공명 같은 2인자를 끝까지 곁에 두고 쓰는 여유와 그릇은 정말 위대한 점이다. 대개 위대한 창업자는 같이 고생은 해도 같이 즐기지는 못한다는 말이 있다. 권력과 부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창업의 기틀이 잡히고 나면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진다. 제왕의 권위와 절대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유비가 항상 배우려 했던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도 창업 후엔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조조도 창업 공신을 많이 핍박했고, 손권은 말년에 의심이 많아져 공신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러나 유비가 창업 공신들을 죽이거나 핍박한 예는 거의 없다. 고생도 같이하고 부귀도 같이 나눈 것이다.



 유비는 전란의 와중에서도 원칙과 도의 겸손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유비를 덕(德) 있는 사람이라 일컫는다. 그것이 유일한 비교우위라고 할 수 있다. 유비 스스로 “조조는 다그치지만 나는 너그러우며, 조조는 사납지만 나는 어질며, 조조는 속임수를 쓰지만 나는 충성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다른 사람과 같이 권모술수로 승부를 겨뤘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안 세우는 덕을 무기로 내세웠기에 천하의 주목을 받고 사람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조조나 유비가 자신의 고향을 근거로 패업을 이룩한 데 비해 유비는 전혀 연고가 없는 땅에서 시작했다. 첫 둥지를 튼 형주(荊州)는 말할 것도 없고 왕국을 세운 익주(益州)도 전혀 연고가 없는 곳이다. 오로지 사람만을 믿고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유비가 인의와 덕을 내세웠지만 행동도 늘 그렇게만 한 것은 아니다. 더러는 패도적 요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예외에 불과하고 대부분 정도(正道)로 가려 했다. 그 어려운 전란 중에서도 이상과 꿈을 갖고 바른 길을 가려 하고 또 실천한 유비의 존재가 돋보인다.  당시의 실력자 조조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유비다. 한실(漢室) 부흥을 외치는 유비로선 한나라를 찬탈하려는 조조에게 굴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나라 손권은 처음엔 결연히 싸웠지만 나중엔 조조에게 굴복해 신하가 될 터이니 황제가 되라고 권한 바 있다. 위대한 경영자는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이상과 원칙을 지키는 뱃심과 결의가 필요하다. 적당히 타협하면 보통의 경영자는 될 수 있어도 위대한 경영자는 될 수 없다.  



  유비가 실천한 원칙이나 바른 길이 당장은 바보스럽고 답답해 보이지만 길게 보면 오히려 좋고 빠른 길이 되었다. 제갈공명이나 방통(龐統) 같은 참모가 좋은 계책을 건의해도 유비가 차마 인의상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해 애를 먹고 답답해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길게 보면 유비의 판단이 옳은 경우가 많다. 유비는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해도 도리에 맞고 지혜롭다는 최고의 경지에 자신도 모르게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유비야말로 타고난 CEO라 할 수 있다. 유비는 당시로선 변방에 속했던 북쪽 사람이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약 400리 떨어진 탁군(琢郡)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시 황제였던 유씨(劉氏) 집안이라 하나 유비가 태어났을 땐 가세가 기울어 시골 가난뱅이에 불과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엔 지방의 말단 관리를 지냈고, 유비는 노모를 모시고 짚신과 돗자리를 팔아 집안을 돌보았다. 당시 시골에선 협객(俠客)이라 하여 장터의 질서를 잡아주고 거간 노릇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유비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이들은 인협(仁俠)의 무리라 하여 의리를 중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나쁜 사람은 응징하는 역할을 했다. 유비는 고향인 누상촌(樓桑忖) 인협 무리의 리더로서 시골에서 힘깨나 쓴 것 같다. 한고조 유방도 시골의 미관말직인 정장(亭長)을 지내면서 인협 무리를 이끌다가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세우고 황제까지 된 인물이다.  당시는 한나라 말기로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다. 농민반란군인 황건적(黃巾賊)이 창궐하여 나라에서 의용군을 모집한다. 유방은 고향에서 의용군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때 관우 ·장비와 더불어 처음 유비의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다.  


  유비의 평생을 보면 신기하게도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 필요할 땐 꼭 누군가 나서서 도와준다. 강제적도 아닌데 유비를 보고 흔쾌히 돕는다. 그때 유비는 정말 별 볼일이 없어 장래에 대한 투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늘이 준 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비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당당하고 뜻이 높았다. 무언가 귀하고 남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한다. 장차 천자(天子)가 될 사람이니 범상치 않은 기상이 풍겼을지 모른다. 유비 자신은 조용하고 의젓했지만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어릴 때 유비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은 뽕나무가 많아 누상촌이라 했는데 바로 집 뒤에 큰 뽕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그것이 마치 큰 우산을 펴 놓은 것 같은 모양이어서 한번은 용한 도사(道士)가 지나가다 이곳에서 매우 귀한 사람이 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한다. 유비는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나는 크면 저 뽕나무처럼 생긴 깃털 달린 수레를 탈 거야”라고 자랑을 했다. 바로 천자가 타는 수레였다. 그 소리를 들은 유비의 숙부는 기겁을 하고 “네가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할 참이냐”고 엄하게 꾸짖었다. 당시는 그런 무엄한 말이 알려지기만 해도 집안이 쑥밭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 숙부는 유비의 첫 후원자가 돼 두고두고 보살펴 준다. 15세가 되어 유명한 스승 밑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이때 자기 아들과 꼭 같이 학비를 부담한다. 유비의 집안 형편으론 학비를 댈 수 없었다.  다 어렵던 시절이라 그 숙모가 “우리 아들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지 않아요”하고 불평을 한 즉, 숙부는 “두고 보시오. 저 아이가 우리 집안을 일으킬 것이오”하고 장담했다. 이때 유비는 고명한 선비이며 고관을 지낸 노식(盧植)의 문하로 들어가는데 그것이 장차 큰 자산이 된다. 이때 같이 공부한 명가집 자제 공손찬은 유비를 동생같이 돌봐주고 유비가 한창 어려울 때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 준다.  


  황건적 토벌 의용군에 참가할 때도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이라는 시골 상인이 군자금을 대준다. 당시는 병사를 모으고 무기 ·말 ·갑옷을 마련하는 비용은 각자 대야 했다. 가난한 유비에게 그런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당시 시골에서 유비는 관우 ·장비와 같이 어울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시골에서 장사를 하려면 그 지방 협객들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유비는 이들을 점잖게 도와주었지 않나 짐작된다. 그래도 전장에 나가는 유비에게 그만한 거금을 대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비의 타고난 복이라 할 수 있다. 세 사람은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되 태어날 땐 달랐지만 죽기는 같이 죽기로 의형제를 맺는다. 복숭아꽃이 활짝 핀 뒤뜰에서 맹세를 했다 하여 도원결의(桃園結義)로 일컬어지는데 그 의리는 죽을 때까지 간다. 당시 관우는 생각이 깊은 데다 무예가 절륜(絶倫)했고, 장비는 의리가 있으면서 힘이 장사였다. 당대 제일의 무장인 두 사람이 모두 유비에게 반해 평생 수족같이 모신다.   당시 유비는 정말 별 볼일 없었는데 이들이 어떻게 유비에게 그토록 심복하게 됐는지 신기할 정도다. 두 사람의 의리와 충성심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데 정말 유비의 대단한 신통력이다. 돈이나 지위를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잘해 준다고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유비의 타고난 자질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출처 :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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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뻐근하다.  손권까지 있는데 벌써부터 귀찮음이 도지니 큰일이다!
요즘 한화, 조승희 등등으로 인해 시끄럽다. 좀 조용한 세상에서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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