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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14) - 유비

솜에 싸인 강철 유비


보통은 너그럽고 겸손하지만 결정적 순간엔 결연히 행동 

  유비의 일생을 보면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강하고, 강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특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아무 기반도 없이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일어나 그만한 패업(覇業)을 이루려면 그런 신축자재함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상황에 따른 빠른 변환(變幻)은 위대한 경영자의 자질이다. 강한 참나무는 센 바람에 부러지기 쉽지만 부드러운 갈대는 흔들릴 뿐이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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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는 적당히 고개를 숙일 줄도,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천하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지향하는 바와 원칙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큰 뜻과 정열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론 매우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것이 유비의 매력이고 강점이었다. 자기 몸을 낮추는 겸손과 높은 내공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비는 솜에 싼 강철이란 비유를 들었다.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개혁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도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삼국지는 너무 유(柔)한 것과 강한 것을 모두 경계하고 있다.  사도(司徒) 왕윤(王允)은 너무 강해서 망한 케이스다. 왕윤은 동탁(董卓)을 제거한 한나라의 충신이다. 변방 사령관이었던 동탁이 군대를 끌고 낙양(洛陽)으로 들어와 권력을 장악하자 아무도 견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나라 황제도 마음대로 바꾸고 수도도 장안(長安)으로 옮기는 횡포를 부렸다. 원소, 조조 등도 동탁을 겁내 장안을 탈출해 고향으로 도망갔다. 그때 왕윤은 동탁 제거를 계획한다. 동탁의 제일 심복인 여포(呂布)를 끌어들여 동탁을 암살하고 그 일당을 소탕한다. 웬만한 배짱과 용기 없인 어려운 일이다. 그 후 왕윤이 너무 원칙대로 강하게만 나간 게 문제였다.   당시 명성이 높았던 대학자 채옹(蔡邕)이 동탁을 옹호했다 하여 옥에 가두고 끝내 죽인다. 이 때문에 인심을 많이 잃었다. 더 큰 실수는 동탁의 군대를 잘못 다룬 데 있다. 그때 동탁의 주력부대는 지방에 가 있었는데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사면령을 내리자는 주위의 권유를 무시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탁의 군대는 서쪽 오랑캐 출신이 많아 매우 난폭하고 용감했다. 그들은 사면령을 기다리다 소식이 없자 죽기 살기로 반란을 일으킨다. 어차피 죽을 바엔 싸움이나 한 번 하고 죽자고 선동한 사람이 바로 유명한 모사 가후(賈)였다. 이들은 반란에 성공해 장안을 점령하고 다시 권력을 잡는다. 동탁이 죽은 지 불과 두 달여 만이다.  왕윤이 좀더 신축성 있게 일을 처리했더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왕윤 일당이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한나라 황실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왕윤으로선 한나라에 충성을 다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반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일은 기업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경영자가 작은 일에 지나치게 원리원칙을 고집하면 기업은 무척 어려워진다.



  유비의 행적을 보면 평소엔 매우 부드러우나 결정적인 순간엔 원칙을 고집한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반대로 행동한다. 큰 일에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서 대세와 관계없는 일에 완고한 것이다. 유비가 황건적 토벌에 참가한 공로로 작은 마을의 벼슬을 할 때였다. 이때도 관우 ·장비 등 의형제에게 군사를 맡기면서 침식을 같이했다. 아랫사람이라 하여 구별하지 않고 동고동락하는 것이 유비의 특성이고 장점이다. 인간적 매력이기도 하다.   작은 고을을 다스리면서 선정을 펴다 보니 백성들도 따르고 인망도 높아졌다. 그때 중앙에서 감독관이 내려왔다. 이 감독관은 은근히 뇌물을 바라면서 유비에게 압력을 가했다. 처음엔 대화로 문제를 풀어보려 했던 유비는 감독관이 너무 심하게 굴자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감독관을 숙소에서 끌고 나와 나무에 묶어 놓고 죽지 않을 만큼 매질을 한다. 고을 사람들도 감독관의 행패를 아는지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협객 출신인 유비로선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평소 무척 온화하지만 원칙에 어긋나면 가차없었다. 벼슬을 던질 각오로 부패 관리를 응징한 것이다.




 유비는 관리의 상징인 인수(印綬)를 감독관의 목에 걸어놓고 의형제들과 함께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벼슬자리에 연연해 타협했더라면 그 후의 유비는 없었을 것이다. 보통은 참고 견디지만 결정적일 때는 모든 걸 던질 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위대한 경영자가 될 수 없다. 소설 삼국지에선 감독관을 매질한 사람은 성질 급한 장비라고 쓰여 있다. 그것은 인자한 유비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꾸민 것이라 한다.  유비는 큰 일에 원칙을 지키다 보니 의외의 수확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작은 것을 버리니 큰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감독관을 매질하고 나서 유비는 북쪽 변방 유주(幽州) 일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공손찬(公孫瓚)을 찾아간다. 유비와는 노식(盧植) 밑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하던 사이다. 공손찬은 유비보다 나이도 많아 늘 유비를 동생처럼 돌봐준다. 공손찬은 그때 원소(袁紹)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유비는 공손찬의 용병대장이 돼 몇 번의 싸움에서 큰 공적을 세운다. 아마도 무용(武勇)이 뛰어난 관우와 장비의 활약에 힘입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공으로 유비는 평원(平原)이란 조그만 마을의 책임자가 된다. 유비는 그 마을을 잘 다스려 그 일대에서 인망이 높아졌다. 그때 이런 일화가 있다. 유비가 평원의 책임자가 되자 옛날부터 세력을 부리던 사람이 유비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다. 그 자객은 유비를 한 번 보고는 “나는 당신을 죽이러 왔지만 백성들이 많이 따르고 막상 당신을 보니 도저히 죽일 마음이 안 난다”고 고백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이 조조의 공격을 받아 도움을 요청해 왔다. 조조 ·원소 ·공손찬이 물고 물리는 싸움을 벌일 때였다. 유비는 공손찬의 의뢰를 받아 1,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주로 갔다. 서주에 도착하자 유비는 도겸과 서주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또 인심도 크게 얻는다. 모두 유비를 흠모하고 따른다. 정말 남다른 인덕(仁德)이다.  



  유비가 간 지 얼마 안 돼 도겸이 중환에 걸렸다. 도겸은 측근을 불러 모으고 “이 서주를 지켜 백성들을 보호할 사람은 유비밖에 없으니 내가 죽은 후 그를 모시라”로 말하곤 유비에게도 서주를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유비는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사양한다. 도겸이 죽자 고을 막료들이 유비에게 도겸의 후임이 돼 줄 것을 간청한다. 유비는 근처 수춘(壽春)에 있는 원술(袁術)이 명문에다 인물도 훌륭하니 그를 추대하라고 한다. 원술은 원소의 동생으로 야심만만했다. 원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막료들은 유비에게 계속 매달린다. 그러면서 우리 고을의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풍부하니 당신을 위해 10만 명의 군대를 모아 주겠다고 했다. 이때 천하의 명망가로 이름이 높던 북해 태수 공융(孔融)까지 나서 “원술은 자기 욕심만 차리고 백성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 당신이 서주를 맡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 다음에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라며 권한다. 유비의 세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이때 이미 명성이 높았던 것이다.  




   신중한 유비는 부근을 지배하던 원소에게도 의향을 물어본다. 당시 원소는 조조보다 더 큰 세력이었는데 유비가 서주를 다스리는 데 이의가 없다는 뜻을 전해온다. 그때서야 유비는 서주를 맡아 다스리기 시작한다. 유비가 정말 사양할 마음이었는지 한 번 제스처로 그렇게 해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사양의 과정을 거쳤기에 안팎으로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서주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서주의 유지 중 미축이라는 재산가가 있었는데 이때 유비의 인품에 반해 자기의 전 재산을 군자금으로 내놓고 유비를 지원한다. 또 자기 누이를 유비의 아내로 준다. 이 인연으로 미축은 자기의 재산과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유비를 따라 천하를 떠돈다. 미축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촉나라까지 따라가 유비의 중신이 된다. 유비에겐 그런 충신이 많다. 



  유비가 신세가 곤궁해 조조에게 얹혀 있을 때였다. 조조는 유비를 잡아 놓기 위해 갖은 호의를 다 보였다. 당시 인망이 높던 유비이니 유비를 수하에 두면 조조의 위신이 크게 올라간다. 정치 기반도 튼튼해진다. 유비를 황제에게 데려가 벼슬을 얻어주기도 하고 자신도 유비를 귀한 상객으로 대우했다. 유비가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조조는 잘 알고 있었다. 천하의 영웅은 조조 자신과 유비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만약 유비가 자신에게 승복만 한다면 조조로선 파격적인 대우를 할 태세였다.  조조의 부하들이 유비는 결코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일찍 없애버리자고 몇 번이나 건의한다. 적이 되면 골치 아픈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조조는 그때마다 유비를 해치면 천하의 인심이 자기를 떠난다며 어떻게든 유비를 붙잡아 두려 안간힘을 다했다. 만약 이때 유비가 조조 밑에 안주했더라면 그야말로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유비와 함께 있던 관우 ·장비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비는 단연 편안한 삶을 버리고 조조 밑을 떠난다. 무슨 고난이 닥칠지 모르지만 조조 밑에 있는 것은 유비의 원대한 포부와 원칙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유비에겐 한실 부흥과 전란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한나라의 신하이면서 황제에 불충하고 전횡을 일삼는 조조라는 사람에게 어찌 순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유비의 생각이었다.



  유비는 보통 때는 매우 관대하고 인자하지만 결정적일 땐 냉정한 결단을 내린다. 여포는 삼국지에서 나오는 무장 중 가장 용감하고 잘 싸우는 인물로 평가된다. 혼자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을 상대로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변방 출신이라 말을 잘 타고 기병전술에 능했다. 뛰어난 무용에 비해 욕심이 많고 의리가 없어 따돌림을 많이 당했다.  동탁의 꾐에 빠져 양아버지인 정원(丁原)을 죽이고 동탁에게 갔고 그 뒤 왕윤과 결탁해 동탁을 죽이기도 했다. 그 여포가 한때 오갈 데가 없어 유비가 거두어 주었더니 오히려 유비의 근거지를 빼앗아 버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 유비는 두 번이나 가족을 버리고 도망을 갔는데 여포는 유비의 가족을 보호한다. 어쩐 일인지 여포는 평소에도 유비에게 호의를 보였었다. 그것도 유비의 인덕이다.   그 여포가 결국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해 사로잡히고 만다. 이때 유비는 조조 편이어서 승자의 입장이었다. 조조와 유비가 나란히 앉은 곳으로 꽁꽁 묶여 끌려온 여포는 목숨을 애걸한다. “지금 조공(曺公)은 천하를 노리고 있는데 저를 부하로 써 주십시오. 제가 기병사단을 이끌고 조공을 도우면 천하무적이 될 것입니다” 하고 애원한다. 사람 욕심이 많은 조조는 약간 마음이 동해 유비를 쳐다본다.  유비만 거들면 여포는 목숨을 구할 판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냉정하게 “옛날 정원과 동탁의 일을 상기해 보십시오”하고 외면해 버린다. 조조는 문득 깨달은 듯 끌어내 죽이라고 명령한다. 여포는 끌려가면서 “내가 얼마나 도와주었는데 저놈이야말로 천하에 의리 없는 놈”이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유비는 사소한 인정에 얽매이기보다 천하의 해물(害物)은 없애버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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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다. 자야겠다.
포브스 잡지랑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니 눈이 다 아프다.
책받침대가 너무 절실하게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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