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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2) - 조조

유연한 사고, 배짱, 열정 겸비

天下를 훔친 아이디어맨.
 

  삼국지에 나오는 세 군주, 즉 조조 ·손권·유비는 모두 영웅호걸로서 출중한 인물이다.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에 살아남아 각기 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하늘이 내린 운과 통 큰 국량, 인품에 각고의 노력이 두루 구비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의 성공한 다국적 기업의 창립자 오너에 비유될 수 있다. 오히려 그보다도 훨씬 어려운 역정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한 발만 헛디뎌도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진다.  패자부활전도 없고 보험도 없다. 그야말로 죽기살기 식의 사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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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사실 창업 과정에서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조조는 전쟁터에서 아들과 조카를 죽였고, 유비는 부인과 아들 등 가족들이 몇 차례 포로가 되기도 했다. 나라를 물려받은 손권은 비교적 평탄하게 보냈으나 스스로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조조와 유비가 전장에서 죽을 뻔한 것은 부지기수다. 모든 것을 걸고 건곤일척의 승부에 나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세 사람은 오늘날로 치면 위대한 경영자의 반열에 오를 사람들이다. 각자 장 ·단점이 달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굳이 서열을 매긴다면 어떻게 될까.


 소설 삼국지연의에선 유비를 정통으로 높이고 또 가장 위대하게 평가하고 있다. 동정도 많이 받고 인기도 높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선 조조를 더 높이 친다. 사실 이루어 놓은 실적이 그렇다. 그것도 요행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하나씩 쟁취한 것이다. 조조가 처음 쉬창(許昌)이란 곳을 근거지로 해서 나라를 일으켰을 때 사방이 강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엔 원소(袁紹)와 공손찬(公孫瓚)이, 동쪽엔 여포(呂布)와 도겸(陶謙)이, 서쪽엔 장수(張繡)와 마등(馬騰)이, 남쪽엔 원술(袁術) ·유표(劉表) ·손책(孫策)이 저마다 기회를 노리며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당시 유비는 공손찬과 도겸에게 곁방살이를 하던 객장에 불과했다.  조조는 이런 강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위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조는 몸소 전장을 누비며 싸움을 주도했다. 어떤 땐 정면승부로, 어떤 땐 꾀와 외교로, 또 어떤 땐 위계(僞計)로 적을 하나씩 물리쳤다.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조조는 스스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말에서 내려와서도 천하를 잘 다스렸다. 그래서 조조는 서양의 시저나 나폴레옹에 비유되기도 한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이란 점에서 특히 그렇다.  조조는 위대한 전략가이면서 정치가 ·행정가이고 또 시인이었다. 당시 삼국 중에서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압도적으로 강했고 종국엔 삼국을 통일했다. 위 ·오 ·촉한 삼국이 솥발처럼 천하를 삼분했다 하나 영토비중을 보면 중국 14개주 중에서 위나라가 10개주, 오나라가 3개주, 촉나라가 1개주를 차지했다.  


 중국의 1개주는 매우 크고 각기 넓이가 다르다. 손권은 양쯔강 이남의 광대한 땅을 차지했는데, 그쪽은 아직 미개척지가 많았다. 유비는 처음 형주에서 시작했다가 익주로 옮겼다. 익주는 옥야천리(沃野千里)라 해서 우리나라 전체보다 훨씬 컸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이 터전을 잡고 실력을 길러 천하를 통일한 땅이다.  당시 중국의 중심지는 황허 유역, 즉 중원이었다. 중국의 옛 도읍지인 뤄양(洛陽)과 장안(長安)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그곳을 조조가 쟁취하고 또 지배했다. 인구를 보면 위나라가 약 65만 호에 440만 명, 오나라가 50만 호에 230만 명, 촉나라가 30만 호에 95만 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유비도 훌륭한 경영자였으나 조조와는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됐다. 손권은 물려받은 가업을 잘 보전하고 키웠지만 창업자에 비해선 한 수 아래로 본다.  


 위대 경영자를 뽑을 땐 항상 사업의 규모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아무리 보석같이 알차고 단단해도 그 규모가 너무 작으면 밀릴 수밖에 없다. 일단 사업 규모가 커야 영향력이나 사회에서의 공헌도가 커진다. 1999년 말 <포춘>지에서 20세기의 위대한 경영자를 뽑을 때도 일정규모 이상의 기업을 이끌면서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기준으로 삼았다. 또 그 기업인은 자신의 세대를 대표하는 산업의 일부를 담당해야 한다고 했다. 그 기준으로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헨리 포드, 현대적인 대기업 조직을 만든 GM의 알프레드 슬로언, 컴퓨터 산업을 일으킨 IBM의 톰 왓슨, 컴퓨터를 쉽게 쓸 수 있게 운용시스템을 만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등 4명을 뽑았다.  그 중에서도 헨리 포드를 가장 선두에 두어 ‘20세기의 기업인’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세상을 바꿀 꿈을 갖고 그것을 실제로 실현한 사람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포드는 편협하고 구두쇠였으며, 자신이 살던 시대의 온갖 편견을 다 가졌다고 덧붙였다. 그런 부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룩한 업적이 워낙 위대했기 때문에 세기의 기업인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위대한 경영자를 꼽을 때 사업 규모와 경제에 미친 영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삼성의 이병철(李秉喆) ·현대의 정주영(鄭周永) ·LG의 구인회(具仁會) 회장이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삼양사의 김연수(金秊洙) ·유한양행의 유일한 ·(柳一韓) ·천우사의 전택보(全澤珤) ·강원산업의 정인욱(鄭寅旭) 회장 같은 분들도 좋은 기업을 일궜지만, 규모와 지속적 발전성 때문에 약간 뒤로 밀린다. 조조와 손권 ·유비 세 사람 가운데  당시 천하의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주고 또 삶을 바꾼 사람은 조조라 할 수 있다. 꿈도 원대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현할 시스템을 마련하고 작동시켰다.


조조는 한나라 말 천하의 혼란을 바로잡고 백성들에게 안정된 삶의 터전을 주는 것을 기치로 내세웠다. 유비는 한실 부흥을 내세웠는데 조조는 이름뿐인 천자를 모시고 있었지만 한실 부흥이 이미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굳이 그것을 내걸지는 않았다. 황족이었던 유비와 달리 환관의 후예인 조조가 한실 부흥 운운해도 먹혀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현명한 조조는 그걸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실의 권위를 가장 잘 이용한 사람도 조조다. 항상 현실에 입각해서 냉철하고 과감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조조의 장기다.  



  위대한 경영자는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정설은 없다. 그러나 큰 그릇은 타고나야 한다. 거기에 가혹한 담금질과 부단한 연마가 있어야 훌륭한 경영자가 되지 않나 생각된다. 또 생각이 자유로워야 한다. 머리 좋은 우등생은 한계를 보인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거나 겁을 내는 경우가 많다. 더러 무모하고 용감한 자만이 황금의 기회를 잡는다. 그래서 기업의 주역 교체와 영토 재편이 일어난다. 시대가 변하는 때에 위대한 경영자가 태어나는데, 그들은 기존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파격적인 발상을 하고 그것을 밀고 나갈 배짱과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명문 귀족으로 태어나는 것이 때로는 도움도 되지만 결정적 승인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한다. 우선 자만심도 강하고 야생마 같은 에너지가 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조도 환관의 자손으로서 경제적 기반은 있었으나 명문은 아니었다. 초기에 의병을 일으킬 때 부친의 재산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조조의 성공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일어난 군웅 가운데에는 조조 정도의 재산과 기반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초기 조조의 최대 라이벌인 원소만 하더라도 훨씬 집안도 좋고 경제적 기반도 탄탄했다. 군사도 조조의 약 5배나 되었다. 그럼에도 원소는 싸움에 지고 집안이 완전히 무너졌다.  조조의 성공은 스스로의 역량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훨씬 앞선데다 노력도 더 많이 했다. 구상력 ·결단력 ·친화력 ·행동력 ·임기응변력이 월등했다. 냉철한 계산력에다 시대의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탁월한 감성까지도 갖췄다. 인간적 매력도 대단했다. 어려서부터 기지와 총명함이 있었으며, 의협심이 강하고 멋대로 놀기를 좋아했다 한다. 덕행과 학업을 닦는 일에 소홀해 사람들이 그를 뛰어난 인물로 생각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젊었을 때는 부잣집 아들로서 자유분방하게 놀았던 것 같다. 위대한 경영자치고 어릴 때 공부만 열심히 한 우등생은 드물다.  그것은 유능한 참모의 몫이다. 그러나 무언가 범상치 않은 자질을 타고나는데 눈 밝은 사람만 그것을 본다.  


 

 젊었을 때의 조조를 보고 당시 유명한 명사인 루난(汝南) 사람 허소(許邵)가 “당신은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고 난세(亂世)의 간웅(姦雄)이 될 사람”이란 말을 했다. 태평 시절엔 유능한 관료가 되지만 세상이 어지러우면 교활한 영웅이 된다는 뜻인데, 듣기에 따라 기분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한다. 또 다른 양국(梁國) 사람 교현(橋玄)은 아예 “난세의 영웅이고 치세의 간적(奸賊)”이라 평했다. 뉘앙스는 약간 다르나 너무 유능해 평범한 일생을 보낼 팔자가 아니라는 점에선 일치하고 있다.  


 만약 조조가 한나라 말 혼란기가 아니고 질서가 잡혔을 때 태어났으면 한 번 사고를 크게 치고 나쁜 이름을 남겼을지 모른다. 나라를 훔치면 임금이 되지만 물건을 훔치면 도적이 된다는 말이 있다. 조조의 모습은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작가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에서 조조가 평생의 라이벌 유비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유비는 문득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가늘고 길게 찢어진 두 눈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빛 때문이었다. 엷은 입술, 짙으나 숯이 많지 않은 수염, 특별히 빼어날 것 없는 얼굴에 일곱 자에 못 미치는 작은 체구지만 그 몸 전체에서 이상한 힘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유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평역 삼국지 1권 ·민음사) 조조가 유비나 손권에 비해 다소 체구가 작았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지략에 있어선 출중했다. 전략도 스스로 구상하고 모든 것을 직접 챙겼다. 사람도 가장 적극적으로 모으고 잘 썼다. 손권이나 유비가 밑에 맡기는 데 비해 조조는 진두지휘 한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샘솟는 형이다. 유능한 부하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은 대신 무능하면 가차없이 도태된다. 사실 유능한 장수나 참모들이 조조 수하에 가장 많았고 대(代)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조조가 일찍 기반을 잡았고 인구가 많은 중원(中原)을 지배한 점도 있지만 조조의 인물 감식안도 빼놓을 수가 없다. 좋은 사람을 빨리 알아보고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끔 뒷받침해준 것이다. 경영자로서 최고의 장점이다.  



/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출처: 포브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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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 코리아라는 잡지를 정기 구독할 때 감명깊게 읽었던 삼국지 경영학입니다.
옮겨 적기 참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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