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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20) - 유비


 유비 ·공명의 2인3각 경영



유비, 늘 힘 실어주며 콤비 플레이

공명, 2인자에 만족… 정성으로 보필



성도(成都) 무후사(武侯祠) 입구엔 ‘명량천고(明良千古)’란 편액이 크게 걸려 있다. 유비와 공명이 같이 이뤄낸 업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현명한 군주와 좋은 신하가 힘을 합쳐 역사에 남을 큰 일을 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선 시대를 넘어 모두 공감하는 바다. 사실 촉한(蜀漢)은 유비와 공명이 2인3각(二人三脚)으로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 다 훌륭한 점은 1인자와 2인자가 끝까지 사이가 좋았다는 것이다. 처음에 잘 시작했다가도 마지막까지 좋게 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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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틀이 어느 정도 잡히고 발전하면 권력 집중화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면 1인자는 2인자가 불편하게 되고, 1인자의 측근에서 2인자 격하 작업이 시작된다. 힘 있는 2인자가 있으면 권력을 나눠야 하는데 그걸 1인자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2인자가 물을 먹기도 하고, 심할 땐 피비린내 나는 숙청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창업자 오너 중엔 고생은 같이해도 영화(榮華)는 함께 누리지 못하는 타입이 많다. 공명은 27세에 유비 진영에 참가해 54세로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하기까지 27년을 유비와 그 아들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유비가 63세로 죽기까지 최측근에서 보좌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비는 한결같이 공명을 존중하고 중용했다.


 
창업자 오너는 싫증을 잘 내 2인자를 오래 두려 하지 않는다. 유비가 공명을 16년이나 2인자로 두었다는 것은 공명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비의 통 큼과 후덕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죽을 때가 돼서도 유비는 공명을 신임해 아들을 부탁했다. 유비의 라이벌인 조조나 손권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점이다. 유비는 유비대로 공명을 정성으로 대하고 의존했고, 공명은 공명대로 유비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충성을 다했다. 두 사람의 신뢰와 팀워크는 이상적인 군신관계로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공명과 같이 유능하면서도 성실한 2인자를 맞이한 것은 유비의 큰 행운이었다. 공명은 2인자 자리에 만족하면서 1인자가 될 욕심이 없었다. 유비를 통해 자기의 뜻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역사상에도 이런 인물들이 많다. 위대한 창업주 군주 밑엔 으레 위대한 2인자가 있었다. 한고조 유방 밑에 있었던 명승상 소하(蕭何)가 대표적이고, 최근엔 마오쩌둥(毛澤東) 밑의 저우언라이(周恩來)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창업자 오너는 대개 개성이 강하고 저돌적인 면이 있다. 그런 강력한 에너지가 없으면 창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회사를 경영하는 덴 합리성과 치밀함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2인자가 해줘야 하는 것이다.



  2차대전 후 일본에서 성공신화를 이룬 전자업체 소니나 혼다(本田)자동차를 보면 위대한 창업자와 그의 충실한 2인자가 2인3각으로 만들어 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니는 위대한 발명가 이부카 마사루(井深大) 밑에 판매관리에 뛰어난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가 있었고, 혼다엔 천재기술자 혼다 쇼이치로(本田宗一郞)를 관리통 후지사와 다케오(藤澤武夫)가 빈틈없이 뒷받침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의 합작품이라 볼 수 있다. 기업이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이런 콤비 경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기업들은 모두 창업자 오너와 2인자가 기막히게 궁합이 잘 맞아 서로 상승효과를 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2인3각 경영은 결코 쉽지 않다. 한국 기업은 보통 수직적 상하관계다. 보기드문 예로 SK그룹의 최종현(崔鍾賢) 회장과 손길승(孫吉丞) 사장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최 회장은 늘 “손 사장은 나의 사업동지”라며 그에 합당한 대접을 했다. 오너에 버금가는 권한을 주고 책임을 지운 것이다. 손 사장도 피고용인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갖고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유비는 공명을 얻음으로써 국가 통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명사와 지식인층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당시는 전란과 혼란의 시기였지만 명사와 지식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은 천하의 여론을 형성하고 그 여론에 따라 인재들이 움직였다. 나라 간 전쟁 중에도 지식인 명사들은 서로 편지도 주고받고 내왕도 했다. 공명은 형주 땅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고, 그 처가가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공명이 유비를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좋은 인재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유비의 신하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유비를 처음부터 따라다닌 창업 그룹, 두 번째가 형주에서 모인 전문가 명사 그룹, 세 번째가 촉나라에 들어가고 나서 참가한 익주 그룹이다. 첫 번째는 관우, 장비, 조운, 미축, 간옹, 손건 등 정과 의리로 뭉친 사람들로서 가신과 다름없었다. 형주에서 처음으로 명사와 지식인들이 참여하는데, 이들은 후에 익주에도 같이 들어가 촉나라 정권의 핵심이 된다. 형주 그룹은 공명이 대표격이고 방통(龐統), 장완(蔣琬), 위연(魏延), 마량(馬良) 형제, 이적(伊籍) 등이 있다. 이들이 참여하는 덴 공명의 역할이 컸다.  방통은 공명과 쌍벽을 이루는 준재로서 익주 점령을 건의하고 주도한다. 그러나 익주 작전 중 유비가 결단을 주저하는 바람에 승기를 놓치고 적의 화살에 맞아 36세로 요절하고 만다. 계략에 능하고 결단력도 있어 요절하지 않았으면 유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마량은 형주의 명문으로서 다섯 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막내가 읍참마속(泣斬馬謖)으로 유명한 마속(馬謖)으로 머리가 좋아 공명이 특히 총애했다. 유비는 나중 백제성에서 죽기 전에 공명에게 마속은 실속보다 말이 앞서니 조심해서 쓰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공명은 계속 마속을 쓰다가 가정(街亭) 전투에서 큰 낭패를 당한다. 유비는 사람을 볼 때에 있어서 공명과 약간 달랐지만 대부분 공명에게 그냥 맡겨두었다. 유비의 위대한 점이다. 공명은 빈틈없는 학자 출신이고 이론가여서 그런 타입을 좋아했다. 그러나 한 나라를 경영하려면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 그 다양한 인재들을 모으는 덴 유비가 큰 역할을 했다. 유비의 후덕하고 큰 인품에 반해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유비와 공명이 서로 취약점을 잘 보완했다 할 수 있다.



후에 촉한의 선봉장으로 큰 공을 세우는 위연이 투항해 왔을 때 공명이 뒷머리에 반골(反骨)이 있어 장차 배반할 것이라며 죽이려는 것을 유비가 살려 잘 포용해 썼다. 유비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드는 큰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유비는 한 가지 재주만 있으면 다른 것은 별문제 삼지 않았다. 유비가 죽고 나서 공명이 인사 전권을 행사했을 때 공정하기는 했지만 다양한 인재를 모으는 덴 성공하지 못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안 모이는 것과 같다. 촉한이 천하통일에 실패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익주 그룹으로는 법정(法正), 허정(許靖), 유파(劉巴), 동화(董和), 이엄(李嚴), 왕평(王平) 등이 있다. 익주의 주인인 유장(劉璋) 밑에서 벼슬을 한 명문들이 많다. 유비는 다소 이질적인 이 세 그룹을 잘 견제 ·조화시키면서 나라를 통솔해 간다.



 
유비가 유장을 쫓아내고 익주를 점령하는 과정을 보면 유비의 깊은 속과 뱃심, 그릇이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익주 지방은 유장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사람은 착했으나 큰 인물은 아니었다. 모두가 익주를 탐내 손권이 유비에게 같이 정벌해 나누자고 제의한 적도 있다. 비는 유장과는 같은 황실 종친인데 어떻게 뺏을 수가 있느냐며 거절한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속셈은 혼자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도 익주 점령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마침 이때 유장이 원조를 요청해 왔다. 조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친척인 유비에게 도와 달라고 한 것이다. 유비가 익주를 뺏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유비 진영에선 익주 점령계획을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유장의 부하 중에서도 유비 측에 내응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법정이다. 법정은 담대하고 계략에 능했다. 이 난세에 유장으로선 익주를 지키지 못하니 차라리 유비가 주인이 돼야 한다고 작정한 것이다. 익주의 갖가지 정보를 다 주며 유비를 도왔다. 유비 진영의 방통도 적극적이었다. 유비는 유장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군대를 이끌고 양자강을 따라 익주로 들어간다. 공명 ·관우 ·장비 ·조운 등은 형주에 남고, 방통과 위연 등이 따라간다.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는 데 대해 유장 진영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잘못하면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장은 유비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익주에 들어가서도 유비는 바로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명분을 살리려고 한동안 뜸을 들인다. 그러다가 마침내 야심을 드러내 유장의 군사와 충돌했다. 그 소동 속에 군사(軍師) 방통이 전사한다. 곤경에 빠진 유비가 형주에 구원을 요청하자 공명이 장비 등과 함께 급히 달려가 유비를 구하고 성도를 포위한다. 이때 신하들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자 유장은 우리 집안이 2대에 걸쳐 익주를 다스렸지만,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지 못하고 전쟁으로 고통을 주었다며 깨끗이 항복해 버린다. 성 안엔 3만 명의 병사와 2년치의 식량이 남아있었다 한다. 유장은 난세에 나라를 지킬 만큼 큰 인물은 아니었지만, 선량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유장의 항복을 받은 유비는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시세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곤 잘 대접해 형주에 가서 살게 한다.  그 뒤 익주를 요리하는 유비의 솜씨를 보면 영웅의 그릇이 그대로 드러난다. 먼저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고 민심을 안정시키려 노력한다.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고 참모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는 것에 반대한 사람들을 적극 포용하고 끌어들인다. 유장 밑에서 일하던 중신들을 그대로 유임시켜 썼다. 대부분 유비에게 승복했지만 일부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곧고 강직한 명사 지식인들이었다. 학자로 이름 높은 유파와 저명한 장군인 황권(黃權)이 대표적이었다. 유비는 부하들이 이들을 손볼까봐 만약 유파와 황권을 해치는 자가 있으면 엄벌한다고 경고하고는 직접 찾아가 같이 일하기를 청했다. 서슬 시퍼런 점령군 사령관이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은 유비의 정성에 놀라 두말없이 나와서는 유비를 극진하게 섬겼다.



 
유장 밑에서 촉군태수(蜀郡太守)를 하던 허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높은 데 비해 실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쓰지 않으려 한다. 그때 익주 사정에 밝은 법정이 와서 “허정은 실력도 별로 없고 처신도 바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름은 높이 나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많습니다. 그렇다고 집집마다 다니며 허정이 어떤 사람이란 것을 설명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 허정을 등용하지 않으면 유 장군은 현명한 인재를 쓰지 않는다는 세평을 들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쓰는 게 어떻습니까”하고 권한다. 그 말을 듣고 유비는 허정을 괜찮은 자리에 등용한다. 이렇듯 유비는 자기 생각과 다르더라도 밑에서 권하면 들었다.



 
유비는 협객 출신으로서 감각적으로 사람을 보고 두루 감싸안는 타입이었다. 타고난 지식인인 공명은 매우 까다롭고 사람을 가려 썼다. 유파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생각이 약간 달랐다. 유비는 형주에 있을 때부터 콧대 높은 지식인인 유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 유파도 협객 출신인 유비보다 지식인인 조조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공명은 같은 지식인으로서 유파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익주를 점령하고 나서 유비는 공명의 건의에 따라 유파를 중용해 나중엔 상서령(尙書令)까지 시킨다. 상서령은 행정을 총괄하는 요직으로 유비가 총애했던 법정이 맡았던 자리다. 유파는 유비의 의형제인 장비를 무식하다고 괄시해 유비가 몹시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유비는 유파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지만, 정권안정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감정을 접을 줄 알았다. 그 후 유파는 유비 정권에서 일하면서 처신을 깨끗이 했고, 유비가 한중왕(漢中王)과 황제가 됐을 때 하늘에 올리는 제문(祭文)과 중요 외교문서들을 직접 썼다. 유비는 다른 인사도 대부분 공명에게 맡겼다. 2인자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익주를 점령하는 데 제일 공신은 법정이었다. 그래서 법정을 촉군태수로 임용하고 큰 권한을 주었다. 이때는 법정이 큰 총애를 받았다. 공명은 한걸음 물러나 기다릴 줄 알았다. 법정이 권력을 쥐자 다소 횡포를 부렸다. 옛날 은혜를 입었던 사람은 파격적으로 봐주고, 유감이 있는 사람에겐 철저히 보복했다. 누가 공명에게 와서 법정을 견제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명은 “옛날 우리 주공이 형주에 있을 때 북쪽은 조조, 동쪽은 손권이 노리고 있고 집안엔 손권의 여동생인 부인이 버티고 있어 늘 불안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법정의 도움으로 익주를 얻어 이제 겨우 한숨 돌리게 됐는데 법정이 좀 마음대로 한들 어떻게 말리겠느냐”고 타일러 보낸다. 이 말을 전해 듣고 법정은 깨달은 바 있어 행동을 조심했다고 한다.  법정은 공명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는데 유비는 이 두 사람을 용도에 맞게 잘 썼고, 공명도 법정의 의견을 존중해 팀플레이를 잘했다. 법정은 개성이 강했지만 전략안(戰略眼)이 뛰어나 후에 유비를 도와 한중 지방을 뺏는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법정도 45세로 요절하고 만다. 유비가 근거지를 마련해 본격적으로 국가경영과 천하통일에 나서려 할 때 죽은 것이다. 법정이 죽었을 때 유비는 매우 슬퍼하며 며칠을 통곡했다고 한다. 만약 법정이 좀더 살았다면 더욱 전략적이고 기발한 계책을 내놓았을 것이고, 유비나 촉한의 모습이 좀 달라졌을지 모른다.  법정은 유비에게 직언을 잘했고, 유비도 다소 어려워하며 받아들였다. 방통도 유비에게 할 말은 하는 타입이었다. 일찍부터 친근하고 공손한 공명과는 약간 달랐다. 방통과 법정이라는 두 거물 참모가 요절한 후 유비는 공명에게 더 의존하게 됐고, 공명의 짐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형주에서 시작된 촉한의 2인3각 경영이 익주를 점령하고 나서도 더 큰 스케일로 전개되는 것이다.  


출처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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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인데 출출하네요.  야식 생각나지만 먹고 치우는 거 귀찮으므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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