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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21) - 유비

유비의 영광과 내리막의 시작



한중 얻고 방심하다 큰 禍 자초

관우 실수로 형주 잃은 뒤 ‘내리막’



  유비가 익주(益州)에 이어 한중(漢中)까지 점령하고 한중왕(王)이 됐을 때가 그의 절정기라 볼 수 있다. 이때 유비는 좋은 신하들도 많고 기백도 넘쳤다. 한중 땅을 뺏는 과정에서 유비는 공명 ·법정을 참모로, 장비 ·조운 ·황충 ·위연 등 맹장을 거느리고 전투를 진두지휘했다. 유비는 조조의 부하 장수들을 보고 “조조가 직접 오면 모를까 너희로선 턱도 없다”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유비는 전투와 군사지휘에선 자신이 있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급하게 달려왔지만 유비는 정면승부 끝에 그를 물리쳤다. 유비가 조조와 맞붙어 통쾌한 승리를 거둔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승리로 유비는 오랜 조조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씨앗이 된다. 콤플렉스도 나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더 큰 화를 부른다. 유비는 한중을 뺏었으나 더 나아가 위나라의 전략요충인 장안(長安)까지 진출할 여력은 없었다. 그것이 당시 촉한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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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나라가 조조의 위나라를 정벌해 천하를 통일하려면 서쪽에선 한중을 기지로 장안, 낙양(洛陽)으로 진출하고 형주에선 수도 허도(許都)를 공략해야 했다. 이른바 2루트 공격이다.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도 이 전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때 조조는 한나라 승상에서 위공(魏公)을 거쳐 위왕(魏王)이 돼 있었다. 한중에서 승리한 후 유비도 한중왕에 오른다. 유비의 부하들은 유비에게 황제가 되라 했으나 유비가 극구 고사하는 바람에 일단 한중왕이 된 것이다.  유비가 늘 본받으려 했던 한고조(漢高祖) 유방도 한중왕을 거쳐 황제가 됐다. 유비가 처음 한중왕이 되는 것을 사양하자, 제갈공명은 "천하의 재주 있고 덕망 있는 인사들이 목숨을 걸고 주인을 섬기는 것은 현명한 주인을 따라 공명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주공이 명분 때문에 끝까지 거절하신다면 그동안 주공을 따라다닌 뭇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까 두렵습니다" 라고 강청하다시피 한다.


부하들도 유비가 왕이나 황제가 돼야 신분이 올라가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오늘날 기업에서 스톡옵션을 받고 나중에 기업이 잘 돼 큰 부(富)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비도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면양(沔陽)에서 정식 왕위에 올랐다. 유비가 58세 때의 일이다. 외아들 유선(劉禪)이 세자가 되고 제갈공명, 법정 등 모든 신하들이 각기 상응한 벼슬을 받는다. 그늘에서 오랜 고생 끝에 햇볕이 쨍하고 뜬 것이다. 이때 유비는 대대적인 논공행상을 하면서 절묘한 인사를 한다. 새로 얻은 한중 땅을 다스리고 북방 전선의 방어를 책임질 한중태수 자리에 위연(魏延)을 발탁한다. 워낙 요직이라 모두 유비의 의형제인 장비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의외로 위연을 임명한 것이다.  위연은 용감하기는 했으나 직선적이어서 공명 등 다른 신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유비는 위연의 행동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임명장을 주면서 유비는 위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위연이 "조조가 직접 오면 주공이 원군을 끌고 올 때까지 버티고, 조조의 부하가 10만 명쯤 군사를 끌고 오면 그냥 초전에서 박살내 버리겠다"고 대답하자 유비는 만족했다 한다.  과연 위연은 유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 임무를 잘 수행했다. 유비는 위연 같은 돌출형도 알아보고 잘 쓴 것이다.  그러나 유비가 죽고 나선 위연의 처지가 어렵게 돼 결국 불행한 종말을 맞는다. 나중에 공명은 1차 북벌에 나섰을 때 중요한 전선 사령관에 위연 대신 젊은 학자형 마속(馬謖)을 발탁했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공명은 합리적 인사를 했지만 유비의 동물적 감각엔 못 미친 것이다.



  유비는 촉나라의 장군 중 가장 뛰어난 다섯 무장에 5호대장(五虎大
將)의 호칭을 준다.  '다섯 사람의 호랑이 같은 장군' 이란 뜻이다. 즉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등이다. 그러나 5호대장은 정식 관직
이 아니다. 삼국지 정사를 보면 관우를 전장군, 장비를 우장군, 마초를 좌장군, 황충을 후장군에 임명하고 조운은 빠진 것으로 돼 있다.  이상하게도 조운은 벼슬에서 늘 뒤로 밀렸다. 유비는 조운을 관우, 장비에 버금가게 믿고 좋아했다.  조운은 일찍이 유비의 호위대장을 맡고 외아들인 유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하는 등 공로도 많았지만, 벼슬이나 작위(爵位)는 일찍 주지 않았다. 조운은 강직한 군인이어서 행동이 근엄하고 묵묵히 맡은 바 일을 다했다. 그래서 유비는 궁중의 기강 잡는 일을 조운에게 맡기기도 했다. 조운이 벼슬에서 자꾸 뒤처진 것이 유비가 조운을 믿고 양보시킨 것인지, 조운의 강직한 성품 때문에 그런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조운은 관우 ·장비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지만 실제 활약은 대단했다. 어려운 고비마다 조운이 나서 뒷수습을 했고 항상 정도를 걸었다. 유비에게 충성했지만 바른 말도 많이 했다. 그래서 후세 사가(史家)들은 조운을 참된 군인, 진정한 충신으로 평가했다. 성도에 있는 무후사(武侯祠)에 가 보면 무신 코너의 맨 앞에 조운을 모셔 놓았다. 관우, 장비 따로 모셨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조운을 꼽은 것이다. 일본에서 삼국지 팬들을 대상으로 한 인기조사 결과 조운이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 가장 명예로운 네 자리의 장군을 정하면서 관우, 장비는 무공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선두에 넣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초는 신참이었지만 대대로 명문에다가 서북방 이민족에 영향력이 커서 특별히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남은 한 자리를 늦게 참여했지만, 익주 정벌과 한중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노장  황충에게 줌으로써 형주 출신에 대한 지역 안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비 군사 중엔 형주 출신이 많았다. 조운이 다소 섭섭해 하겠지만 잘 이야기하면 양해할 것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이 인사안을 두고 제갈공명이 걱정을 한다. 조운을 빼고 황충을 넣으면 한중 싸움에서 황충의 활약을 직접 본 장비는 괜찮겠지만, 관우가 가만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유비가 그 문제는 자기에게 맡기라면서 인사를  강행한다.




 
임명장을 갖고 비시(費詩)가 형주로 가서 관우를 만난다. 과연 관우는 노장 황충과 동렬에 앉을 수 없다고 새 벼슬을 받지 않는다. 그동안 같이 고생한 조운의 탈락에 대한 배려도 있었을 것이다. 비시가 관우를 달랜다.  "장군은 한중왕(유비)의 의형제로 같은 몸이라 할 수 있는데 벼슬의 높고 낮음이 어찌 문제가 됩니까. 옛날 한고조 유방이 황제로 취임했을 때 황제가 한신(韓信)이나 진평(陳平)과 같이 신참자를 더 우대해도 측근들이 불평했단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장군이 한중왕의 입장을 잘 헤아리지 않고 벼슬을 거절하신다면 한중왕이 얼마나 섭섭해 하시겠습니까" 하고 설득한다. 유비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심복하던 관우는 "정말 선생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하고 두말 않고 벼슬을 받는다.  유비가 인사를 강행한 것은 관우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관우는 자존심이 강한 대신 순수한 면도 있었다. 관우는 마초가 유비 진영에 처음 참가했을 때 공명에게 편지를 보내 마초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으면서, 그 무용이 대단하다고 하자 서천으로 가서 한번 겨뤄보고 싶다고 말한다. 현명한 공명은 관우의 의도를 즉각 알아차리고 답신을 보낸다. 즉 마초가 문무겸전의 호걸이기는 하나 장비와 겨룰 만한 정도지 천하절륜의 관우 장군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적어 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 관우는 대단히 만족해 하며 부하들에게 그 편지를 돌렸다고 한다. 공명이 유비 밑에서 2인자로 그토록 장수한 것은 이런 예민한 감각과 기민한 대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유비가 큰 가슴으로 큰 포석을 하면 공명은 두루두루 살펴 치밀하게 챙기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유비가 한중을 빼앗고 동료가 큰 공을 세우자 관우도 슬슬 위나라에
대한 공세를 준비한다. 그때까지 형주의 관우는 어디까지나 방어에 주력했다. 당시 촉나라의 병력으론 한중과 형주 양쪽에서 싸움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한중 쪽의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군사도 증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형주 쪽의 사기를 위해 전쟁과 승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관우는 군사들을 동원해 양양 북쪽의 위나라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공격한다. 처음 관우의 공격은 눈부신 성공을 거둔다.  위나라 대장 우금(于禁)을 사로잡고 방덕(龐德)의 목을 벤다. 위나라 요충지 번성도 함락 직전까지 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하던지 위나라에선 수도 허도를 옮겨 잠시 예봉을 피할 생각마저 했다.  이때 관우의 명성은 천하를 울리고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때가 관우, 더 나아가 촉나라의 최성기(最盛期)였다.


 나라나 기
이나 절정 뒤가 항상 위험한 법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그 위험을 피하려면 절정에 달했을 때 긴장을 풀지 말고 더 조심해야 한다. 또 바닥을 다져야 한다. 그러나 욱일승천의 기세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다. 절정기의 영광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나락의 위험이 바짝 다가와 있는 것이다.



 
사실 관우의 빛나는 승리 밑엔 허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오나라 손권과의 동맹 관계가 삐걱대고 있었다. 그동안 관우는 북쪽으론 조조군, 동쪽으론 손권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촉나라와 오나라가 연합해서 위나라에 대항하는 구도였지만 촉과 오 사이에도 긴장 관계가 끊이지 않았다. 쟁점은 형주 땅의 귀속 문제였다. 형주 땅은 오나라 손권이 촉나라 유비에 잠시 빌려 준 형식이었으나, 유비는 형주를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처음엔 익주를 차지하면 돌려주겠다고 했으나 익주를 차지하고 나서도 핑계를 들어 시간을 끌었다.  손권은 몹시 화가 나서 유비와의 동맹 관계를 깰 생각을 하면서 유비에게 시집보냈던 여동생을 데려가 버린다. 그리고 군사를 동원해 형주를 접수하려 한다. 유비도 이에 지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맞선다. 두 나라 군사가 충돌 직전에 가서야 관우와 노숙의 단독회담이 이뤄지고 거기서 타협점을 찾는다. 즉 형주 땅을 세로로 흐르는 상수(湘水)를 경계로 해 서쪽은 촉나라, 동쪽은 오나라 땅으로 나눈 것이다. 두 나라가 싸우면 위나라 조조만 유리하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손권은 유비의 끝없는 욕심에 화가 났고, 유비는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형주 문제는 일단 봉합했으나 불씨는 남아 있었다. 관우는 유능하고 용감한 장군이었지만, 정치적 안목과 개인 성격엔 문제가 있었다. 공명이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고 익주로 들어갈 때 큰 지침을 주었다. 즉 동쪽으로 오나라와 잘 사귀면서 북쪽의 조조에 대항하라는 것이었다. 관우도 오나라에 대한 신경을 많이 쓰기는 했다. 그래서 북쪽으로 번성을 공략하러 가면서 병력을 형주와 공안성에 남겨 둬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서전에서 너무 크게 이기자 경계심이 풀어져 버렸다. 관우의 성격도 문제였다.  손권이 자신의 아들을 관우의 딸과 짝지워 주자고 정략결혼을 신청했을 때 관우가 한마디로 거절해 버린다. 그것도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호랑이의 딸을 어떻게 개의 자식에게 줄 수 있느냐" 고 말하면서 혼담을 가져온 제갈균(諸葛均)을 혼내서 보낸다. 제갈균은 공명의 친형으로 점잖고 촉나라에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사실대로 이야기를 들은 손권은 크게 노한다. 관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또 관우가 출정하기 전 형주성을 미방, 공안성을 부사인(傅士仁)에게 맡겼는데 평소 이 두 사람은 관우에게 괄시를 당해 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 관우가 10년간 형주사령관을 지내면서 오만해졌던 것이다. 관우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유비도 관우를 어렵게 대했으니 공명도 견제가 어려웠다. 기업에서도 대개 이런 경우 큰 사고가 난다. 관우는 출정하기 전 미방과 부사인이 조그만 실수를 하고 군량을 제대로 보급하지 못하자 형주로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까지 했다. 두 사람은 더욱 떨게 됐다. 관우로선 발밑에 화약을 묻어둔 격이었다. 의심하면 쓰지 말고, 쓰면 의심하지 말라고 했는데 인사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것이다.



 
더 근본적인 실책은 눈앞의 승리에 도취해 국제 정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관우가 승승장구하자 위나라에서 교묘한 외교전을 편다. 위나라 전략가 사마의(司馬懿)는 오나라 손권에게 형주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관우의 배후를 치게 하자고 조조에게 건의한다. 영민한 조조는 즉시 오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손권은 이 기회야말로 형주를 되찾을 절호의 호기라 보고 조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위나라와 제휴해 관우를 배후에서 기습하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관우나 촉나라는 새까맣게 몰랐다. 손권은 형주 작전을 노련한 장군인 여몽(呂蒙)에게 맡긴다. 친유비파인 노숙이 죽어 병권(兵權)이 형주수복파인 여몽에게 넘어간 것도 관우와 촉한의 불행이었다.




 
여몽은 관우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병을 이유로 사임을 하고, 그 후임으로 무명의 육손(陸遜)을 보낸다. 육손은 젊었으나 매우 유능했다. 취임하자마자 관우에게 인사장을 보내면서 매우 공손하게 군다.  유능한 여몽이 사직했다는 말을 듣고 관우는 마음을 놓고 형주에 남겨 두었던 군사마저 빼 번성 공격에 투입한다. 이 틈을 타 여몽은 형주를 기습공격해 전광석화처럼 점령해 버린다. 관우에게 유감이 많았던 미방과 부사인도 오나라에 얼른 항복해 버린다. 번성에서도 조조가 증원군을 보내 반격에 나서자 후방 근거지를 잃은 관우는 진퇴유곡에 빠진다.  관우는 처음엔 오나라의 배신과 기습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사실로 판명되자 관우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사방에 깔린 오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손권은 관우를 항복시켜 부하로 만들고자 하지만 영원한 유비 사람인 관우가 들을 턱이 없다.  관우는 같이 잡힌 양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장렬히 죽음을 맞는다.




 
유비를 따라 전장을 누빈 지 40여 년, 의형제이며 주공인 유비가 확실한 기반을 잡아 천하통일의 첫발을 내디디려 할 때 어이없게도 죽은 것이다. 관우의 죽음으로 유비의 촉한은 천하의 요충인 형주 땅을 잃고 변방의 지방 정권으로 전락한다. 유비의 천하통일 계획도 치명타를 입는다. 관우 개인으로서도 그토록 짧은 기간 동안에 영광의 절정에서 참담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출처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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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너무 덥네요.
내일부터 비가 온다니 조금은 선선해 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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