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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22) - 유비

유비의 마지막 고집과 파국의 시작


균형감각 잃고 吳 정벌 강행

승산없는 전쟁 일으켜 '낭패'


  관우의 죽음은 촉한은 물론 오나라와 위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관우가 10여년간 통치하던 형주 땅은 천하의 배꼽과 같은 요지로서 삼국 세력의 균형축(均衡軸)었는데 그 땅이 송두리째 오나라에 넘어갔으니 국제 질서에도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가장 타격을 받은 사람은 역시 촉한의 유비였다. 국가적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관우가 우호관계에 있던 오나라의 기습을 받아 형주도 빼앗기고 부자가 같이 참수 당했다는 것이 더 통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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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우가 오나라에 잡히기 직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촉나라 장군 유봉(劉封)과 맹달(孟達)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깨끗이 거절당했다. 유봉은 유비의 양자로서 관우의 조카뻘이었다. 둘 다 관할지가 안정되지 않아 군대를 다른 데로 뺄 수 없다는 명분이었지만 평소 뻣뻣했던 관우의 태도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구원군을 요청하러 갔던 특사는 할 수 없이 성도(成都)까지 갔는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유비는 스스로 관우를 구하러 가겠다고 출동 준비를 시킨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관우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고 유비는 혼절하고 만다.



  관우는 유비가 형제처럼 아끼고 신뢰하는 창업 공신이다.
또 유비가
 젊은 시절 군대를 일으킨 이래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의형제며 당시 촉한의 제2인자였다. 웬만한 일은 공명이 알아서 처리했지만 관우만은 특별대우했다. 유비는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했다 한다. 제갈공명 이하 신하들도 할 말을 잃었다.  공명은 관우를 형주에 너무 오래 둔 걸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관우가 손권 측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거 위험하게 됐구나" 하고 생각해 관우를 교체할 생각도 했으나 그 후 승전보만 들려와 안심하고 있던 차에 비보가 날아든 것이다. 유비는 온 나라에 상복을 입게 하고 관우의 장례를 몸소 치렀다. 그리고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단단히 맹세했다. 유비는 오나라 손권을 비롯해 관우를 배신한 부사인, 미망 또 구원군을 안 보낸 유봉, 맹달 등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당장 오나라 정벌 군사를 일으키려는 것을 공명 등 신하들이 극구 말린다. 사실 당시 촉한으로서는 오나라에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유비는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가슴 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유비의 분노를 짐작한 맹달은 도저히 살아남을 가망이 없다고 보고 위나라로 도망간다. 위나라에선 정략적으로 맹달을 후대한다. 유봉은 같이 가자는 맹달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대로 남았다가 성도에 불려가 자살하게 된다. 아무리 양자지만 관우를 잃은 유비의 분노를 달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 유봉은 용맹이 뛰어나 장차 유비의 적자(嫡子) 유선과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있으므로 미리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유봉을 죽이고 맹달을 망명시킨 것은 후에 유비와 촉나라에 큰 부담이 된다. 사실 관우를 비명에 보내고 나서 유비는 사람이 다소 바뀐다. 균형 감각을 잃고 무리한 고집을 부리게 된 것이다.




 
손권으로서도 관우를 죽이고 그토록 바랐던 형주를 차지했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유비와 관우의 관계를 잘 아는 오나라에선 유비가 틀림없이 대군을 이끌고 복수하러 올 것이라 판단했다. 대책회의 끝에 위나라에 책임을 슬쩍 미루기로 했다. 그래서 관우의 수급을 위나라 조조에게 보냈다. 어디까지나 조조의 뜻에 의해 관우를 죽인 것으로 하기 위해서다.  이 속셈을 조조가 짐작 못할 턱이 없었다. 조조는 원래 관우를 좋아한 데다 촉나라에 대한 배려도 있어 관우의 몸을 좋은 나무로 깎아 붙이고 예를 갖춰 정중히 묻어 주었다. 제후(諸侯) 대우로 치러진 장례식엔 조조가 직접 참석했다.



 
지금도 낙양성 남문 밖엔 관림(關林)이란 웅장한 관우의 사당과 묘가 있다. 수령 300년이 넘는 800그루의 측백나무가 빽빽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유비에 대한 빛나는 충절(忠節)과 장렬한 죽음 때문에 관우는 거의 신으로 대접받고 있다. 역대 왕조에서도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관우를 정책적으로 높이 받들어 왔다. 처음 관우가 죽었을 땐 제후 대우였지만 그 후 왕이 되고 황제가 되고, 이젠 신의 지위까지 올랐다. 중국에선 문성(文聖)으로 공자(孔子), 무성(武聖)으로는 관우를 치기까지 한다. 그래서 무덤도 공자는 공림(孔林), 관우는 관림으로 불리는 것이다. 관림에 가보면 계절별로 큰 제사를 드리고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다. 정부 당국에서도 관우의 인기를 잘 알아 제사 등에 세심한 신경을 쓴다. 특히 민간에서 인기가 높아 관우 사당엔 누워서 책을 보는 관우의 전신상이 있다. 관우가 늘 앉아서 책을 보니 피곤할 것이라며 민간에서 돈을 모아 만든 것이라 한다. 소설 <삼국지>는 사실이 7할, 허구가 3할이라 하는데 3할의 대부분이 관우와 공명에 관한 부분이다. 두 사람을 신격화시킨 것이다.


  손권도 관우의 머리는 낙양의 조조에게 보냈지만 촉한에 대한 대비책으로 근처 당양(當陽)에 관우의 무덤을 만들고 정중히 제사를 지내주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당양의 관릉(關陵)은 낙양의 관림처럼 웅장하다. 안에 들어가면 여러 채의 사당이 있어 참배객들이 큰 향을 피워 놓고 소원을 빈다. 머리 없는 묘는 제일 뒤에 있는데, 조그만 산과 같이 봉분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큰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관릉도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관우는 중국의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관우의 묘는 세 군데나 있다. 목은 낙양의 관림에, 몸뚱이는 당양의 관릉에 있고, 혼은 관우의 고향인 산서(山西)성 운성(運城) 부근 해현(解縣)에 있는 관제묘(關帝廟)에 모셔져 있다. 해현은 소금의 집산지인데 옛날엔 소금이 전매품이어서 전국 조직망을 갖고 장사를 했다. 물론 암거래도 많았다. 해현 상인들은 중국 각지로 나가 장사를 하면서 고향의 위대한 인물인 관우의 초상을 걸어놓고 수호신으로 삼았다.  관우가 무예도 높고 신의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엔 관우가 재신(財神)으로 불리기도 한다. 금전에는 결백했던 관우에겐 의외의 칭호라 할 수 있지만, 큰 돈을 모으려면 관우처럼 신의를 생명과 같이 중하게 여기고 장사하란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서울 동대문 밖에 관우 사당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인들이 가져와 모신 것이 시초라 한다.



  관우가 죽은 해에 오나라 여몽도 뒤따르듯 죽고 그 다음해 초엔 평생 관우를 그토록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던 조조도 숨을 거두었다. 그동안 유비는 관우의 원수 갚기를 벼르고 별렀으나 주위의 만류와 촉한의 국력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조조 뒤를 이은 조비(曹丕)가 드디어 한실(漢室)을 없애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한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유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몇 번 사양하다 촉한의 황제가 된다. 유비가 61세 때의 일이다. 가난한 시골 출신의 한 협객이 40여 년의 간난(艱難) 끝에 드디어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간 것이다. 유선이 황태자, 공명은 승상이 되고 다른 신하들도 각각 높은 벼슬을 받았다. 공명과는 다른 계보로 유비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명군사(名軍師) 법정과 백전노장 황충은 그 전 해에 병으로 죽었다.




 
황제가 되자 유비는 오나라를 쳐서 관우의 원수를 갚을 생각부터 한다. 정 많은 유비는 스스로는 황제가 돼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관우의 원수를 그대로 두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위에선 여전히 말린다. 오나라보다 위나라를 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위나라 조비가 한실을 빼앗고 황제가 됐으니 그쪽을 먼저 쳐서 한실을 부흥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 측근들은 군비를 강화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위나라부터 먼저 없애자고 권했다. 유비도 마지못해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이때 막내 동생인 장비가 나타나 불을 질렀다. 장비는 당시 파동(巴東) 지방을 맡아 다스리고 있어 성도엔 자주 오기가 어려웠는데, 황제 취임식에 온 장비는 유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통곡했다.  "형님이 황제가 되셨는데 관우 형의 원수는 갚지 않고 무얼 하십니까. 우리 같이 죽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재촉한다. 유비가 "나도 그러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꾸 말린다" 고 하자 격정적인 장비는 "다른 놈들이 우리 형제의 약속을 어떻게 압니까. 만약 형님이 안 가시면 나 혼자라도 가서 원수 손권과 싸우다 죽겠습니다" 고 소리를 지른다. 이 대목에 이르러 유비도 결심을 한다. 관우의 원수를 갚으러 갈 테니 군사를 모아 강주( 江州 오늘날의 중경 )로 오라면서 오나라를 징벌하기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유비로선 천하통일을 위해선 전략적 요지인 형주를 꼭 되찾아야 한다는 것과 거느린 군사 중에 형주 출신이 많아 그들의 고향을 수복해야 한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촉나라에선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유비는 일단 결심했으니 두말하지 말라고 못을 박는다.




  이 때 학자 진복(秦宓)이 나서서 반대하다 옥에 갇힌다. 강직한 조자룡이 다시 나선다. 관우 장군의 원수를 갚는 것은 사적인 일이고, 위나라를 쳐서 한실을 부흥하는 것은 공적인 일이므로 오나라보다 위나라를 먼저 쳐야 한다는 것이다. 위나라를 정복하면 오나라는 스스로 와서 항복할 것이라며, 촉나라와 오나라가 싸우면 위나라만 좋아질 것이라고 눈물겹게 간한다. 백번 옳은 말이었지만 유비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조자룡 정도 되니까 그런 충언을 용감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충언이란 대개 입에 쓴 것이므로 윗사람이 좋아하지 않는다. 자리는 물론, 잘못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한 가지 충언을 하려면 열 가지 공을 세운 다음에 하라는 말이 있다. 조자룡으로 말하면 그동안의 공적이나 유비에 대한 충성심에서 아무도 시비를 걸 수가 없었다. 유비도 조자룡의 충언을 잠자코 들었지만 따를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원정군에서 빼고 후방군 사령관에 임명한다. 그리고 스스로 총사령관이 돼 정벌군을 지휘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때 유능한 장군 황권이 유비에게  "폐하께서 직접 지휘할 게 아니라 제가 선봉이 돼 오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니 폐하께선 후군을 거느리고 오시라" 고 권한다. 그러나 유비는 마구잡이로 앞장서 원수를 갚으러 가겠다고 고집한다. 그리고 황권도 장강(長江) 북쪽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해 오나라와의 싸움에선 빼 버렸다. 이미 유비는 냉철한 판단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때 가장 고심했던 사람이 제갈공명이었을 것이다. 승상으로서 당연히 유비를 말려야 하지만 유비와 관우와의 관계, 또 유비의 원통한 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강하게 반대를 못 했지 않나 짐작된다.




 
기업 경영에서도 그런 일이 많다. 위대한 창업자가 마지막 고집을 부리고 그 심정을 잘 아는 2인자가 그걸 막지 못할 때 큰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복수전이 실패한 후에 공명은  "만약 법정이 살아 있었다면 이 참화를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하고 크게 탄식하는 장면이 있다. 법정이었다면 유비를 더 강력히 말렸을지 모른다. 유비도 법정을 좀 손 아파했다. 공명은 너무 친숙하고 가족 같은 사이여서 유비가 덜 어려워했다. 공명도 유비의 입장을 너무 잘 헤아렸는지 모른다.  한중 싸움 때의 일이다. 유비가 최일선에 나가 매우 위험한데도 피할 생각을 안 했다. 여러 사람이 후방으로 가도록 건의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때 법정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로 뛰어나갔다. 유비가 위험하다고 고함을 쳤으나 법정은 고집을 부렸다. 유비가 달려가 붙잡아도  "폐하가 위험한 일을 하시는데 어찌 신하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며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할 수 없이 유비가  "나도 피할 테니 군사(軍師)도 피하라" 고 하자 법정이 뒤로 물러선 적이 있다. 그 법정이 죽어 유비가 말을 들을 만한 손 아픈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위대한 경영자도 말년에 가면 너무 자신 과잉이 돼 균형감각을 잃는 일이 많다. 평생 불가능한 일을 천재적 노력으로 가능하게 해왔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조직 내에 효과적인 견제 장치나 경영자가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작은 비극으로 끝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개인은 물론 조직이 큰 파국을 맞게 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영자인 헨리 포드도 말년에 정치에 개입한 데다 낡은 경영방식을 고집하고 사람을 잘못 써서 포드 자동차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포드 자동차가 워낙 탄탄해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포드의 은퇴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 비극이 벌어질 뻔했다. 일본 최고의 경영자로 존경받고 있는 마쓰시타 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도 말년에 정당을 창당해 정치에 참여하려는 것을 사내는 물론 일본 재계에서 강력히 말려 겨우 단념시킨 적이 있다. 그 대신 새로운 정치인을 체계적으로 양성할 마쓰시타 정경숙(松下 政經熟)을 만드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특히 위대한 창업주는 법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는 물론 빛나는 카리스마를 갖춰 아무도 반대를 못 하게 된다. 그것이 새 사업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만약 지도 노선이 잘못되면 조직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말년에 결단을 내린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과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전개한 세계경영도 비슷한 예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촉한의 유비는 오나라 정벌군을 발진시켰고 본인 스스로 선봉에 섰다. 백만 대군이라 선전했지만 당시 촉나라의 국력으로 보아 5만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삼국 중 가장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던 촉나라로선 국력을 총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위나라를 북쪽에 둔 채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와의 싸움에 나서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는 유비에게는 그런 국가 전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고집을 부려 대군을 이끌고 가세등등하게 출발하는데, 이 때 유비와 촉한의 대비극이 시작됐던 것이다.



출처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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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찍 포스팅해봅니다.
음!!
요 이틀간 방문자수가 2배로 껑충 뛰었네요. 반가워해야 할 일이지만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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