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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28) - 손권


형주쟁탈전.

주유 죽자 守成 기조로 전환



유비 견제하며 조조에 대항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손권은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형주는 유비가 오갈 데 없을 때 임시로 빌려 준 땅이고, 익주란 큰 땅을 차지했으니 이젠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손권이 4만 군사를 동원하면서 오와 촉은 일촉즉발의 긴장에 휩싸였다. 이때 조조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실적인 손권은 다시 유비와 손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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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은 유비와 형주성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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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유의 죽음은 손권과 오나라의 명운을 크게 바꿔 놓았다. 손권뿐 아니라 유비, 조조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오나라의 2인자였던 주유가 좀더 살았다면 삼국지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주유는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권위와 세력이 한껏 높아져 있었다. 주유는 확장론자였으며 유비 견제파였다. 유비는 위험한 존재니 일찍 없애고 조조와 직접 맞붙어 천하를 다퉈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유비가 차지하고 있는 형주(荊州) 땅도 마저 뺏고 유비가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주유의 주장대로 됐으면 두 나라는 훨씬 일찍 무력 충돌에 들어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유비는 익주(益州)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고 삼국정립 구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 형주는 중국 대륙의 배꼽과 같은 요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 중에서도 강릉(江陵)은 형주의 중심지로 장강 남북을 잇는 요충지다. 수군 기지가 있고 장강을 통해 익주로 가는 길목이다. 유비가 손권에게 형주를 잠시 빌려 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유비는 지방의 작은 세력에 불과했다. 손권도 유비의 세력을 대단치 않게 보았다. 누이를 시집보내고 형주를 빌려 주면 오나라를 위해 애쓸 것으로 생각했다. 형주의 옛 주인 유표가 갈 곳 없는 유비에게 북쪽 국경인 신야(新野)성을 주고 조조의 침략을 막게 했던 일을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유비는 형주를 얻음으로써 제갈공명이 구상했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의 첫 포석을 할 수 있었다. 또 위, 촉, 오나라가 솥발같이 서는 삼국정립(三國鼎立) 판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유비가 형주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가 얼마나 놀랐는지 그 침착한 조조가 들고 있던 붓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일찍이 유비의 그릇됨과 야심을 간파했던 조조는 이제 유비란 용이 물을 얻어 웅비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형주는 손권에게도 매우 중요한 땅이었다. 장강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려면 전략적 요충인 형주를 꼭 차지해야 했다. 유비로서도 오랜 유랑 끝에 처음으로 얻은 근거지 형주를 결코 내줄 수 없었다. 이렇게 형주를 둘러싼 이해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언젠가는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북쪽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조조 때문에 동맹 관계가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손권은 매제가 된 유비의 청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형주를 빌려 주기는 했지만, 속으론 입속에 있는 음식을 뺏긴 것처럼 불쾌해했다 한다. 이때만 해도 손권은 유비를 객장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유비가 계속 욕심을 부리자 손권은 화가 많이 난다.


  주유는 죽기 전에 형주를 건너뛰어 익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운다. 익주의 주인 유장(劉璋)은 유약하므로 장강을 이용해 익주로 쳐들어가 오나라 땅으로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손권은 유비에게 같이 익주를 정벌해 영토를 나누자고 제의한다. 이때 유비는 익주를 혼자 차지할 속셈이 있던 터라 손권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한다. 거절 명분이 유비답다. 즉 익주의 주인 유장은 자신과 같은 한나라의 황족으로 동생뻘인데, 익주를 치면 천하 사람들이 이 유비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면서 손권이 익주를 친다면 천하가 부끄러워 자신은 산속에 숨을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면서 손권의 군사가 장강 북쪽으로 가는 것을 막는다.  주유는 익주 정벌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주유는 손권 곁에 있는 노숙(魯肅)이 친유비파이기 때문에 손권이 자꾸 유비 편을 든다고 생각하고 진강(鎭江)으로 손권을 직접 찾아가 설득한다. 즉 손권의 사촌형인 손유(孫瑜) 장군과 함께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익주를 먼저 점령하고 뒤이어 한중(漢中)도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당시 오나라의 수군 실력이면 유비의 방해쯤은 돌파할 수 있었다. 익주 지방을 평정한 다음 조조와 원수 관계에 있는 서량(西凉) 지방의 마초(馬超)·한수(韓遂)와 우호 관계를 맺어 조조 포위망을 형성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손유 장군은 한중 방면에서, 주유 자신은 손권과 함께 형주 방면에서 군사를 일으켜 동서 양쪽에서 위나라로 쳐들어가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매우 적극적이고 스케일이 큰 전략이었다. 속으로 야심만만하던 손권도 주유의 전략에 찬성한다.

  주유가 손권의 허락을 얻어 본격적인 준비를 위해 형주로 돌아오는 도중에 파구(巴丘 : 현 호남성 악양시)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병석에 눕는다. 그동안 손권을 보좌해 오나라의 기둥 노릇을 하느라 동분서주한 것이 무리가 됐는지도 모른다. 특히 건곤일척의 적벽대전을 치르고 뒤처리를 하느라 매우 고생이 심했다. 적벽대전 후 조조는 강릉성에 동생뻘인 조인(曹仁)을 남겨두고 갔는데, 조인도 천하 명장이어서 1년여의 혈전 끝에 겨우 강릉성을 뺏을 수 있었다. 그 공방전에서 주유는 큰 부상을 입었다. 또 주유는 유비를 견제하느라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손권이 주유의 적극책을 듣지 않고 노숙의 말을 많이 듣는 것에도 속이 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손권과 직접 담판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익주 정벌이라는 웅대한 계획을 막 실천하려는 판에 급병을 얻은 것이다.


  소설 삼국지에선 제갈공명이 귀신같은 솜씨로 주유를 골탕먹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직선적 성격의 무장인 주유는 노회한 유비와 천하의 기재(奇才) 공명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다. 주유가 친유비파인 노숙에게 여우 같은 공명에게 속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다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노숙은 주유가 손권에게 천거한 인물이고 둘이 매우 친하기는 했으나 정치적 견해는 약간 달랐다. 유비나 공명으로서도 주유가 몹시 거슬렸을 것이다. 손권과 노숙은 유비에게 잘해 주려 하는데 자꾸 주유가 방해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주유의 세력과 실력이 워낙 커서 손권도 마음대로 하기 어려웠다.  손권 정권의 안정을 위해선 주유의 뒷받침이 꼭 필요했다. 주유는 손권을 깍듯이 모셨지만 손권은 주유를 신하로서만 대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형으로서 또 공동경영자로서 정중히 대했다. 어떤 기록을 보면 손권이 유비와 진강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  "주유 장군은 문무지략이 뛰어나고 인망도 출중하니 내 밑에 오래 있을 것 같지 않아 걱정" 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손권은 주유를 신뢰하기는 했으나 신하가 너무 강력하면 군주는 걱정을 하게 마련이다. 통치권이 위협받는 사태가 되면 냉혹하지 않은 군주는 없다. 손권도 그런 면에서는 냉혹해서 나중에 주유 못지않은 공을 세운 육손(陸遜)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주유가 일찍 죽는 바람에 좋은 관계로 끝났지만 좀더 살았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남경 감로사에는 손권과 유비가 천하를 얻고자 하는
뜻을 빌며 갈랐다는 시검석(試劍石)이 있다.
(南京=권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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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는 병석에 누워 손권에게 간곡한 유언장을 쓴다. 주군을 오래 모시지 못함을 사죄하고 자신의 후임으로 노숙을 천거한다. 주유는 노숙이 자신과는 달리 신중한 수성론자이지만, 현실감이 뛰어나고 충성심이 있으니 적임자라고 본 것이다. 자신이 세상을 뜬 후 적극적 공세를 펴기보다 있는 것을 잘 지키는 것이 옳다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주유가 죽으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어찌 주유를 세상에 내놓고 다시 공명을 내셨나이까" 하고 외쳤다는 애달픈 장면은 늘 공명에게 당한 주유의 울분이라 볼 수 있다.

 
 주유가 파구에서 죽자 손권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이제 누구를 의지해 나라를 다스릴꼬" 하고 한탄했다 한다. 오나라에서 주유는 실력도 있었을 뿐 아니라 인기도 높았다. 명문에 잘 생긴 데다가 인망도 있어 오나라 장군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오나라엔 초대 손견 때부터 활약한 나이 든 공신들이 많았다. 그 대표격인 정보(程普)는 주유가 어리다고 처음엔 고분고분하지 않았지만, 적벽대전 때의 탁월한 지휘능력을 보고는 찾아가 사과하고 승복했다 한다. 정보는  "주유 장군은 잘 익은 술과 같아서 같이 있으면 어느새 그 향기에 취하게 된다" 면서 앞장서서 따랐다. 그 주유가 죽었으니 오나라에선 모두 애통해하며 엄숙하게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때 주유의 영구를 오나라로 운반해 간 사람이 방통(龐統)이다. 방통은 주유가 남군태수로 형주를 다스릴 때 그 밑에 참모로 있었다. 방통은 노숙의 추천으로 손권을 만나기까지 했으나 중용되진 못했다. 태도가 뻣뻣한 데다가 용모가 추해 손권의 눈에 났다. 더 결정적인 것은 손권이  "배운 학문이 주유와 비교해서 어떠냐" 고 묻자  "주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 답해 주유를 제일로 치고 존경하던 손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이때는 이미 오나라의 참모들과 관료조직이 정비돼 코드가 다른 외부인이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방통은 나중에 유비와 만났을 때도 괄시를 당했다. 그러나 유비는 방통을 다시 불러 크게 중용했다. 유비와 가까운 오나라 노숙으로부터  "방통은 비범한 인재니 큰 자리를 줘야 그 재주를 펼 수 있을 것" 이란 서신이 온 데다가 공명이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다. 후에 방통은 공명 버금가는 참모로서 유비를 위해 큰 활약을 한다. 손권으로서는 매우 아까운 인재를 놓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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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柴桑)에서 거행된 주유의 장례식엔 공명이 직접 참석했다. 공명에게 유감이 많은 주유의 부하들이 해칠까 봐 주위에서 많이 말렸지만 공명은 고집을 부려 참석했다. 주유의 영전에서 공명이 어떻게나 애절하게 조사(弔辭)를 읽고 슬퍼하는지 참석한 오나라 장군들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가 나쁜 줄 알았더니 공명은 안 그런데 주유가 속이 좁아 그렇게 됐구나" 하고 수군거렸다 한다. 공명이 벌인 조문 외교의 빛나는 성과라 할 수 있다. 공명은 주유가 죽으니 안도하기도 하면서 좋은 라이벌이 없어져 섭섭하기도 한 착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손권으로서도 주유의 죽음은 큰 타격이었지만 주유 사후에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다.


  주유가 죽고 친유비파인 노숙이 병권(兵權)을 쥐게 됨으로써 손권은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 주고 조조에게 공동 대항하는 전략을 펴게 된다. 이때가 1차 형주 분할인데 형주군의 동쪽 끝인 강하(江夏)와 장사군 북쪽의 한창(漢昌)은 오나라가 점거해 군사를 주둔시켰다. 형주를 빌려 주기는 하지만 장강 동쪽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을 점거해 유비군의 목덜미를 잡은 것이다.


  유비는 오나라와의 우호 관계가 확실해진 것을 기회로 안심하고 익주 정벌에 나선다. 2년여의 고전 끝에 드디어 유장을 몰아내고 익주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처음 유비가 익주 정벌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손권은 매우 화를 냈다. 같이 정벌하자는 손권의 제의를 거절해 놓고 혼자 갔기 때문이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다고 하자, 손권은 빌려 준 형주를 돌려 달라고 요구한다. 형주는 유비가 오갈 데 없을 때 임시로 빌려 준 땅이고 익주란 큰 땅을 차지했으니 이젠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절로 간 사람이 공명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이다. 그러나 유비는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앞으로 서량 지방을 공략할 계획인데 서량을 차지하면 형주를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형주를 돌려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손권은 매우 화를 내면서 비상수단을 생각한다.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 주도록 건의했던 노숙의 입장도 매우 곤란해졌다. 손권은 유비와 사이가 안 좋은 여몽(呂蒙)에게 영능(零陵), 장사(長沙), 계양(桂陽)을 접수하도록 명령한다. 세 곳에 파견된 오나라 관리는 형주 사령관 관우에게 쫓겨 온다. 드디어 손권은 무력에 의한 점령을 결심한다. 4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는 한편 손권 자신이 육구(陸口)까지 나와 군사를 지휘한다. 이 소식을 듣고 유비도 놀라 역시 3만 명을 거느리고 장강을 내려와 공안(公安)에 주둔한다. 두 나라 사이에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북쪽에 공동의 적인 위나라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손권은 유비가 너무 배은망덕(背恩忘德)하다고 생각해 응징키로 한 것이다.  또 신하들 보기에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주유가 살아 있었다면 곧바로 전쟁으로 갔을지 모르나 노숙이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무력충돌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한창 두 나라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조조가 한중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급해진 유비는 손권에게 화의를 요청했다. 둘 다 전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벌인 무력시위라 타협도 빨랐다.  이때 노숙이 다시 나선다. 즉 노숙은 유비 측의 형주 사령관 관우에게 단독 회담을 제의한다. 군사들을 백 보 밖으로 물리친 채 칼 한 자루씩만 차고 육구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마지막 타협을 시도한다. 소설 삼국지에선 이 장면을 매우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관우가 소수의 측근들만 데리고 오나라 진영으로 건너가 노숙을 준열히 타이른 후 유유히 돌아오는 것으로 돼 있다. 노숙이 형주 땅을 돌려달라고 하자 땅은 천하의 것으로 덕(德) 있는 사람이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꾸짖고는 영웅적으로 형주로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사실 이때 노숙은 관우에게 촉나라의 염치없음을 큰소리로 공박했다고 한다. 전후 사정을 잘 아는 관우는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노숙이 유비를 위해 얼마나 애썼으며 지금도 친유비파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숙이 관우에게 큰소리를 낸 것은 유비에게 너무 관대하다고 불만이 많은 오나라 장군들, 나아가 손권에게 들어가라고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노숙이 큰소리를 친 것은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노숙은 형주 분할안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것은 유비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노숙의 주도로 체결된 형주 2차 분할안을 보면 형주 남부를 남북으로 흐르는 상수(湘水)를 경계로 동쪽은 오나라가, 서쪽은 촉나라가 갖는다는 것이다. 손권이 대군을 동원해서 얻은 것은 장사 남부와 계양뿐이었다. 노숙은 어떻든 유비를 달래 조조에게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손권은 이런 노숙의 구상이 다소 불만스러웠지만 양해했다. 현실적인 손권은 유비가 괘씸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권은 결코 감정 때문에 나라에 손해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 점은 손권이 오히려 유비보다 냉철했다. 유비는 정에 따라 많이 움직였다. 손권은 유비와 신경전을 많이 벌이고 전쟁도 하지만 항상 현실적 계산 위에서 행동했다. 조조와의 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CEO로서 손권의 뛰어난 점이다. 나이는 20여 년이나 어리지만 외교에 있어선 훨씬 노련함을 보인 것이다.



출처 :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 포브스 심층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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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어깨가 뻐근하네요. 삼국지 경영학은 조조편이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손권 편은 그다지 흥미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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