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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3) - 조조

조조의 전략적 안목과 결단


"천하 얻으려면 천자를 가까이"

봉황 잡으려 ‘대장군’ 내놨다
 

 

  위대한 경영자는 시대의 흐름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결단할 수 있어야한다. 시대의 흐름은 비범한 통찰력을 갖춰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타고난 자질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감지하든 참모의 의견을 듣든 뛰어난 동물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공부를 하고 훈련을 쌓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나 한계가 있다. 그것은 경영자의 또 하나의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은 처음엔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간헐적인 징후로 보일 뿐이다. 그 징후가 거듭되면 하나의 조류를 이루고 그것은 불원간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루하루를 보면 비슷한 날이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가는 것과 같다. 세상의 민심이라든지 시대의 변화는 예민한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다. 오동잎이 떨어지면 가을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천시(天時)란 말이 바로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알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머리 좋은 경영자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분명히 앞을 내다보았는데 이것저것 생각하다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생각 못하는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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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의 위대함은 비상한 통찰력과 때를 놓치지 않는 행동력이다. 그래서 천시를 가장잘 탔고 처음부터 유리한 고지를 점해 마지막까지 압도적 우위를 유지했다. 조조 ·손권 ·유비 가운데 항상 조조가 앞섰다. 오늘날의 기업 경영에 비유하면 창업도 가장 빨랐고, 시장점유율도 가장 높았으며, 수익률이나 재무구조도 가장 좋았다. 사소한 싸움에선 손권이나 유비가 더러 이길 때도 있었지만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조조의 위(魏)에 평정될 운명이었다. 세 나라 가운데 위가 압도적으로 강해 오(吳)와 촉(蜀)이 연합해야만 겨우 대항할 수 있었다. 그 연합이 잘 될 땐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둘 다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조의 전략은 늘 두 나라를 분열시켜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조조는 일찍부터 그 출중한 자질을 드러냈다. 말 잘 듣는 체제 순응적인 모범생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임기응변과 지략이 풍부했다. 명문 거족도 아니고 학자 집안도 아니었으나 돈은 많았다. 그런 집안 배경 때문에 그토록 발상이 자유롭고 행동이 거침없었는지 모른다. 격변기의 경영자로선 딱 맞는 자질이다. 조조는 부잣집 아들답게 방탕한 생활도 했으나 큰 뜻은 항상 버리지 않았다. 부친의 돈으로 부지런히 놀고 사람도 많이 사귀었고 인심도 후했다. 그러나 남몰래 공부도 많이 하고 특히 병법(兵法)을 부지런히 익혔다. 현실에 안주해 재산이나 모으면서 적당히 살기보다 무언가 꿈을 찾고 도전한 것이다.  



  청년시절 수도 장안(長安)에서 경찰서장직을 맡게 된다. 집안의 재력이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취임하자마자 성문에 5색 몽둥이를 죽 세워 놓고 누구든 궁성 문을 출입하는 법을 위반하면 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겠다고 선언을 한다. 이때 재수 없게도 당시 세도가의 숙부가 걸려든다. 평소 조카의 세도를 믿고 거들먹거리던 자였다. 조조가 법대로 하려 하자 부하들도 말리고 사방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그러나 조조는 굴하지 않고 몽둥이로 때려죽인다. 그 때문에 조조의 명성은 널리 나지만 세도가에게 찍혀 지방으로 좌천하게 된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리나 유지하고 출세하는 것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젊었을 적엔 당시 권력자였던 대장군 하진(何進)의 참모 노릇을 했다. 하진은 당시 세도를 부리던 환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장군들을 불러올릴 의견을 내놓는다. 환관들도 군대를 갖고 있어 지방의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같은 참모였던 원소를 비롯한 다른 사람은 찬성했지만 조조는 반대한다. “환관이란 예부터 황제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발호하는 것이다.  실제 아무런 힘이 없고 주동자 몇 사람만 처벌하면 간단히 제압된다. 똑똑한 사법관리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괜히 이들을 견제한다고 지방의 군대를 끌어들이면 이리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부르는 꼴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조조의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고, 그때 불러들인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을 점령해 나라를 한동안 쥐고 흔든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조조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능력은 갈수록 날카로워져 평생 변하지 않는다. 정권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측근으로 쓰려 한다. 소위 출세길이 훤히 열린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의 한계를 재빨리 보았다. 동탁은 한실을 없애고 자신이 천하를 차지할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대세나 동탁의 그릇으로 보아 오래 못 간다는 확신이 섰다. 조조는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한다. 이때 이미 조조는 창업자 오너가 될 길에 들어선 것이다. 조조가 고향으로 도망가는 길에 여백사(呂伯奢)라는 아버지 친구의 집에 들른다. 그 집에선 환대를 하지만 중간에 무슨 오해가 생겨 여백사의 식구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이때 조조는 자기가 하는 일에 장애가 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해치우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내가 천하를 배반해도 천하가 나를 배반하게 할 수는 없다."  이때 조조가 한 말이다.  


 조조는 고향에 돌아가자 전 재산을 털어 군사를 모았고, 지방의 제후들에게 동탁 타도를 호소한다. 원소(袁紹) ·원술(袁術) ·손견(孫堅) ·공손찬(公孫瓚) ·한복(韓馥) ·포신(鮑信) 등 중국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동탁 타도를 위해 모인다. 후에 촉을 세운 유비는 공손찬의 용병대장으로 겨우 참가하고, 손견은 오나라 손권의 아버지다. 연합군의 대의명분은 근사해도 속셈은 각기 달랐다.  이때만 해도 조조는 여러 군웅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세력도 미미했다. 그러나 포부나 지략은 뛰어났다. 연합군은 총대장으로 원소를 추대한다. 좋은 집안에 세력도 가장 강했다. 원소 집안은 4대에 걸쳐 정승을 낸 명문 가운데 명문이었고 원소의 인망도 높았다. 그러나 지략이나 그릇에 있어선 조조에 못 미쳤다. 토벌군이 몰려오자 동탁은 천자와 함께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간다. 조조는 동탁을 추격하자고 하지만 다른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조조는 혼자서 군사를 이끌고 동탁을 추격하지만 반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는다. 항상 적극적인 조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 뒤 연합군은 흐지부지되고 각기 영지로 돌아간다.   조조는 천하의 대의를 세우려면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리고 천하의 주인이 될 뜻을 정하고 세력 확대에 매진하게 된다. 이때부터 뛰어난 인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집안에도 우수한 인재가 많았지만 천하를 경영하기 위해선 더 유능한 인재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 때 그에 상응하는 인재를 갖추지 못하면 조직은 기형이 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이 될 때, 야당이 갑자기 집권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타고난 감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세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토를 넓히고 백성을 모아야 한다. 이때 조조는 비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말로 하면 전략적 사고로 시스템적 접근을 한 것이다. 당시는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연이은 전란으로 백성들이 땅을 잃고 마음을 붙이고 살 데가 없었고 중국 천지에는 유랑민이 들끓었다. 이들에게 안심하고 살 터전을 만들어 주자, 백성들을 전란에서 구하고 천하를 태평케 하자, 그러면 나의 패업은 저절로 탄탄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백성들을 지켜주고 먹여줘야 한다. 그걸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보통 싸움을 통해 성과 영토를 뺏을 생각만 할 때에 조조는 한 수 더 본 것이다.  이때 시행된 것이 둔전제(屯田制)와 호병제(戶兵制)다. 당시만 해도 식량부족이 심각했다. 큰 기근이 한 번 들면 수백만 명이 굶어 죽고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조조는 전란으로 버려진 논밭을 모두 나라에서 거둬들이고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을 씨앗이나 농기구, 심지어 소까지도 빌려주고 추수 땐 산출량의 6할을 받았다.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다. 그래서 많은 유랑민이 조조의 영내로 몰려들었고, 조조 영지의 식량이 증산되면서 자연히 경제력은 날로 튼튼해졌다. 그 대신 세금을 매우 가볍게 해 주었다.  호병제는 병사를 일반백성과 구별해 일정지역에서만 근무하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들이 그 뒤를 잇게 한다. 도망가면 가족 전체가 처벌을 받는다. 이 때문에 조조는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상비군을 유지하게 되고 비상동원 체제도 갖추게 되었다. 조조가 전쟁에서 패해도 군사를 계속 보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은 선순환구조를 이뤄 인구 증가와 부의증강으로 연결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 전란 틈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놀라운 일이다. 위대한 경영자는 남이 생각 못한 것을 앞서서 생각하고 실천한다.  이와 비슷한 때에 조조는 또 하나의 획기적 사업을 한다. 바로 한나라 천자를 자신의 근거지로 모신 것이다. 당시 한나라 황제는 동탁에 얹혀 있다가 동탁이 죽고 천하가 전란에 휩싸이는 바람에 유랑생활을 하는 처지였다. 지위만 높았을 뿐 힘이 없어 매우 궁핍한 상태였다. 동탁에 의해 장안까지 끌려갔다 낙양으로 돌아왔으나 누구 하나 받드는 사람이 없었다. 조정이란 것도 이름뿐이었다. 이때 천자를 모셔와 천하에 명분을 세우자고 어느 참모가 건의한다. 무슨 말인지 조조는 빨리 알아들었다. 조조가 천자를 모시겠다고 하자 궁핍했던 천자와 조정에선 대환영이다.  조조에게 대장군이란 큰 벼슬을 내린다. 이때 원소에게 태위(太慰) 벼슬을 내리는데, 조조보다 낮다고 받지 않자 조조는 두말 않고 대장군을 양보한다. 명분보다 실질을 항상 중시한다. 조조는 천자를 모시고 근거지인 쉬창(許昌)으로 돌아간다. 그 다음부턴 조정과 천자의 이름으로 모든 명령이 나간다. 조조가 곧 조정이 되어 다른 제후들을 호령하게 된 것이다. 또 천자의 권위를 매우 편리하게 쓴다. 비록 실권이 없는 천자이지만 그 이름이 갖는 상징적인 가치를 재빨리 간파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선각자이고, 매우 동물적인 계산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출처: 포브스코리아 구독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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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블로깅을 합니다.
나름대로 바빠서 온라인 생활에 소홀했어요!!
알게 모르게 많은 분들이 방문해 주셨더군요. 댓글이나 방명록에 굶주렸습니다.
유령은 나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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