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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34) - 손권

손권의 절정기와 그늘

황제 된 뒤 오만과 과욕 부려…총명 흐려지고 신하들 의심

  옛날엔 삼국의 군주 가운데 손권이 가장 어렸으나 이젠 가장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했다. 그래서 자만심이 생겼는지 모른다. 점차 총명도 흐려지고 더러 과욕도 부린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캐기 위해 보낸 서복(徐福)의 자손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미지의 섬에 원정대를 보내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시기심과 의심이 많아진 점이다.

 손권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를 그의 절정기라 볼 수 있다. 48세의 한창 나이에 에너지도 충만했다. 공들여 키운 좋은 신하도 많았다. 모두 손권에게 심복하고 충성을 다했다. 오랫동안 오나라를 괴롭히던 소수 민족들의 반란도 어느 정도 수습되고 국내 정세도 안정을 유지했다.
북쪽 위나라의 위협은 여전했으나 촉나라와의 상호 방위조약이 건재했기 때문에 안보상 문제는 없었다. 물려받은 오나라를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 손권이 자만(自滿)할 만했다. 손권의 위신은 높아질 대로 높아지고 통치권도 확고했다. 손권은 촉나라와 교섭할 일이 있을 때 주로 승상 공명을 상대했다. 물론 촉나라 황제 유선이 있었으나 승상 공명에 의해 국정이 주도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다. 여러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의 점령 계획까지 합의했다. 즉 위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중원 9개주 중 동쪽에 있는 서주·청주·예주·유주는 오나라가, 서쪽의 연주·양주·병주·기주는 촉나라가 갖되 중간에 있는 사예주는 함곡관을 경계로 나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손권은 점령할 각 주의 책임자를 임명하기까지 했다. 촉나라도 같이 했다. 위나라를 점령하기 전에 영토부터 나눠 가진 것이다. 득의절정에 있던 손권으로선 그런 욕심을 내볼 만했다. 공명도 한창 북벌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손권과 보조를 맞출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국력으로 보아 오나라와 촉나라를 합쳐도 위나라에 못 미쳤다. 위나라에 내분이 일어나 자멸하기 전에는 위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CEO는 통 큰 목표를 내세워야 한다. 현실적인 손권이라 세 나라 국력의 실상을 잘 알았지만 통치 전략상 거창한 목표를 내세웠을 수도 있다.


 이 때 오나라의 최고 실력자는 육손이었다. 이릉 전투에서 유비군을 완패시킨 데다 조비군의 침공 의도를 효율적으로 분쇄해 한없이 위신이 높아져 있었다. 또 위신에 버금가는 실력과 내공을 갖추고 있었다. 주유·노숙·여몽에 이어지는 오나라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권은 일단 신임하는 사람에겐 전권을 주고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게 한다. 이때 손권이 육손과 나눈 대화에서 육손에 대한 깊은 신임을 엿볼 수 있다. 손권은 주유 · 노숙 · 여몽 등을 회고하면서 “주유는 뛰어나게 통이 크고 대담했다. 특히 기상(氣像)이 커서 다른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우나 장군이 그걸 이어받았다. 노숙은 주유가 천거해 데리고 왔다. 노숙은 내게 천하의 정세를 논하고 제왕이 되는 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매우 통쾌했다. 적벽대전 때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다른 여러 사람이 놀라 항복하자는 것을 단연코 반대해 주유와 함께 적을 물리쳤다. 그 뒤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는 실수를 범했으나 앞의 두 가지 공로에 비하면 작은 것이다. 여몽은 젊었을 때는 용감한 장수로만 봤으나 그 뒤 학문을 익히고 시야를 넓혀 기발한 책략을 구사하는 명장이 됐다. 그러나 의논해 재능을 발휘하는 점에서는 주유에 미치지 못한다.” 손권은 육손을 면전에 두고 주유에 버금가는 인물이라고 칭찬을 해 준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감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손권은 황제로 취임한 그해 가을 도읍을 무창에서 건업으로 옮긴다. 무창은 유비의 침공에 대비한 임시 도읍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국내외 정세가 안정되자 본거지인 건업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손권은 건업으로 돌아가면서 황태자인 손등(孫登)을 무창에 남게 하고 육손을 보호자로 임명했다. 당시 21세였던 손등은 매우 총명하고 후덕해 신하들의 신망이 높았다. 손권도 매우 사랑해 장래가 촉망됐다. 조비가 계속 재촉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에 인질로 보내지 않았던 바로 그 아들이다. 조비가 몇 번이나 군대를 출동시키면서 아들만 보내면 철군시킨다 해도 손권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만큼 아들을 사랑하고 아꼈던 것이다. 손권은 육손을 나라의 기둥으로 대접했다. 장군으로서 출중할 뿐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데도 뛰어난 문무겸전의 인재여서 국가 대사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오나라와 촉나라는 외교사절이 빈번히 왕래했는데 모든 외교 문서는 무창에 주재하는 육손이 마지막 점검을 한 후 보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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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손권의 관인을 육손이 한 개를 보관하게 하고 문서를 고칠 일이 있으면 바로 수정해 그대로 손권의 도장을 찍어 보내도록 했다. 육손은 황태자를 엄하게 교육시켰다. 손권도 손등 주변에 장래가 촉망되는 친구를 두어 같이 크게 했다. 대원로 장소와 중신 제갈근, 장군 진무의 아들, 승상 고옹의 손자 등 쟁쟁한 준재들이었다. 황태자 곁에는 손권의 둘째아들 손려(孫廬)도 같이 있었는데 육손은 대권을 이어받을 황태자와는 다르게 대접해 일찍부터 신분상 차이를 알게 했다. 손등은 효심이 깊고 신중했다. 또 아랫사람을 잘 보살펴 장차 좋은 황제가 될 것이란 칭찬을 받았다. 아우 손려도 매우 영리하고 신하들의 신망이 높았다. 그러나 20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일찍 죽었다. 손권이 너무나 슬퍼해 큰아들 손등이 무창을 육손에게 맡기고 건업으로 달려가 아버지 곁을 지켜야 했다.


 손권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일로 달래는 듯 적극적으로 일을 벌였다. 종래까진 주로 방어하는 데 치중했으나 위나라에 어린 황제가 들어서자 오히려 공세를 취했다. 옛날엔 위·오·촉 세 나라 군주 중 손권이 가장 어렸으나 이젠 가장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했다. 그래서 자만심이 생겼는지 모른다. 육손은 내치에 힘쓰자는 입장이었으나 적극적인 손권의 방침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가 되기 직전 손권은 육손과 주방(周)을 시켜 위나라 군사를 유인해 큰 승리를 거두고 장강 이북의 넓은 땅을 얻었다. 손권의 빛나는 승리였다.

이 때가 CEO로선 매우 위험한 시기다. 한 번 성공하면 더 큰 성공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특히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공을 거두면 CEO의 자신감은 더 높아진다. 더 큰 도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부추기는 세력도 있다. 따라서 CEO가 도전에 성공해 위신이 절정에 달했을 때 위험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손권이 황제가 되고 난 후부터 그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황제가 된 다음 해에 손권은 수천의 군사를 보내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찾게 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캐기 위해 보낸 서복(徐福)의 자손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미지의 섬이다. 육손이 이 원정 계획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손권은 듣지 않았다. 육손의 건의를 거의 들었던 손권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손권은 자신의 노후에 대비해 불로초에 관심이 있었는지 모른다. 원정군은 오랫동안 바다를 헤매다가 돌아왔는데 책임자는 직무 태만을 이유로 처형당했다. 황제가 된 지 4년 후엔 더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멀리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이 사신을 보내 오나라에 귀속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제까지 요동은 위나라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특사를 보내 공손연을 연왕(燕王)에 봉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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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장소, 손권, 노숙, 주유


 장소 이하 신하들의 반대가 많았다. 아직 믿을 게 못되고 잘못하면 큰 망신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손권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왕의 사령을 들려 특사를 보냈다. 손권으로선 멀리 찾아와 자신을 받드는 데 대해 기특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워낙 손권이 강하게 나오니 다른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차츰 손권이 아랫사람의 쓴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유연하던 손권이 차츰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치 빠른 신하는 몸을 사리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조직의 동맥경화증이 시작된다. 그러나 대원로 장소만은 끝까지 연왕 책봉을 반대했다. 손권이 칼에 손을 대면서까지 장소를 위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장소는 평소에도 워낙 반대를 많이 해 손권이 덜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장소는 손권이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아예 집에 틀어박혀 조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손권의 특사가 간 것을 가까운 대국 위나라가 알고 공손연을 위협하자 공손연은 매우 놀라 특사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내고 말았다. 오나라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다. 손권은 펄펄 뛰면서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직접 응징하러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될 일이 아니었다. 신하들의 결사적인 만류로 출정은 막았지만 손권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떨어졌다. 무엇보다 장소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냉정은 잃지 않아 손권은 장소의 집에 사과하려고 찾아갔으나 장소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몇 번 찾아가도 여전하자 손권은 화가 나 문 앞에 흙산을 쌓아 버렸다. 장소도 안에서 흙산을 쌓았다. 손권과 장소의 오랜 다툼을 아는지라 다른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볼 뿐이었다. 손권이 다시 찾아가 불러도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손권이 대문에 불을 질러 버리자 장소의 아들들이 장소를 억지로 떠메고 나왔다. 손권은 장소에게 사과하고 수레에 같이 타고 궁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부터 장소는 다시 조회에 참여했다 한다. 손권이 실수는 했으나 그래도 냉정함을 되찾아 나라의 대원로를 정중히 모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손권의 영민함이 살아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손권의 총명은 점차 흐려지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은인자중할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손권의 인간적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의심과 시기심이다. 오랜 신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그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위에 거슬리면 가차없이 물을 먹였다. 또 오래된 잘못을 새삼 드러내어 책망하거나 벌을 주기도 했다. 장온(張溫)은 촉나라와 수교 회복을 할 때 공이 큰 사람이었다. 교섭을 잘했다고 여러 번 칭찬도 받았다. 장온이 한 번은 촉나라에 갔다 와서 공명이 정말 정치를 잘하고 있더라고 칭찬을 했다. 처음엔 그냥 넘겼으나 다시 공명 얘기를 꺼내자 손권은 안 좋은 기색을 보였다. 정치라면 자신이 최고로 잘하고 있는데 공명을 칭찬하니 화가 난 것이다. 또 공명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장온은 평소 근엄하고 남을 잘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으니 참았다가 나중에 다른 사건으로 걸려들자 가차없이 추방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공명이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세상이 어지러울 땐 다소 거칠더라도 특출한 재주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으나 일단 세상이 안정되면 제거되기 쉽다. 그러나 재주꾼들은 그걸 잘 모르고 옛날같이 굴다가 큰 낭패를 당한다. 당시로선 절대군주가 의심을 하거나 괘씸하게 생각하면 끝장이다.

 특히 자신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용서하지 않는다. 승상 고옹은 손권과 이야기한 것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고 모든 공을 위에 돌렸기 때문에 평생 손권 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조 밑의 순유(荀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군 앞에서 당당히 정론을 펼친 신하들은 뒤끝이 좋지 않았다. 신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한 손권은 감찰기관을 강화하고 그 책임자에 혹독한 여일(呂壹)을 임명한다. 여일이 중신을 사찰하고 약점을 보고하는 것을 손권은 은근히 즐겼다. 그러니 여일은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여일은 닥치는 대로 중신을 사찰했다. 여일의 계급은 낮았지만 손권이 뒤에 버티고 있어 권세가 막강했다. 조정 대신들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당시 육손도 여일의 횡포를 알고 걱정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다. 당시에도 털면 먼지 안 날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그러면 여일 같은 사람이 횡포를 부리게 된다.

 비교적 자유롭던 오나라는 공포 분위기가 됐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말을 못하고 보다 못한 황태자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으나 손권은 한마디로 물리쳤다. 손권이 노해(老害) 상태에 들어갔던 것이다. 여일의 권세는 날로 높아져 나중엔 승상 고옹이나 좌장군 주거(朱據)를 조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손권의 양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드디어 강직한 반준(潘濬)이 나선다. 반준은 애초 관우가 형주를 다스릴 때 참모로서 형주 사람들에게 인망이 있었다. 형주가 오나라에 점령당한 후 반준은 집안에 칩거하고 나오지 않았다. 워낙 신망 있는 사람이라 손권이 특별히 수레를 보내 모셔와 간곡히 부탁하고 요직을 맡긴 사람이다. 손권을 섬기고 나서도 엄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공을 많이 세워 손권도 한몫 놓아 주던 사람이었다. 당시 형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반준은 여일의 횡포를 듣고 비상수단을 생각했다. 즉 손권에게 이야기해 없애는 것은 어려우니 건업으로 출장 온 김에 중신들을 모두 초대해 한 자리에서 베풀고 여일을 그 자리에서 베어 죽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같이 죽겠다는 작정을 했다. 여일은 재수가 좋았는지 그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 목숨은 건졌다. 그 전부터 반준이 여일을 벼르고 있어 예감이 안 좋았는지 모른다. 바로 얼마 전 여일이 승상 고옹의 뒷조사를 할 때였는데 한 가까운 사람이 물었다.

“고옹 승상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 같아”, “고옹이 그만두면 누가 후임이 될 것 같습니까?”, “잘 모르지만 반준도 후보자의 하나지”, “만에 하나 강직한 반준이 승상이 되면 당신은 무사할 것 같습니까?” 정신이 번쩍 든 여일은 반준이 승상이 되는 기회를 막기 위해 고옹에 대한 조사를 적당히 했다 한다.

반준의 여일 참살 기도는 소문이 퍼져 손권도 알게 됐다. 손권도 반준 같은 중신이 자기 목숨을 걸고 여일을 없애려 할 정도라면 사태가 심각하다 생각하고 차츰 여일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손권의 총애가 식자 여일은 사방에서 규탄돼 얼마 안 가 처형됐다. 여일을 제거하고 나서 손권은 여러 가지로 생각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사태의 심각성을 왜 몰랐을까. 왜 중신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자신이 완전히 외톨이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여일 건은 잘못됐다고 하면서 위에서 잘못하면 적극적으로 고쳐 줘야지 가만히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책망했다.

비록 손권의 총명은 바래기 시작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손권의 마지막 대실수인 황태자 소동이 벌어진다. 이 소동으로 손권의 말년이 오욕으로 끝나게 되고 오나라도 명을 재촉하게 된다.
 

출처 : 포브스 정기구독 중 발췌 
前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최우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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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만함이 독이 될 때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손권!! 

한살 한살 먹어갈수록 삼국지의 내용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특히 최우석 前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이 쓴 삼국지 경영학은 두고두고 읽어도 맛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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