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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4) - 조조

용인(用人)의 천재 조조


'인재제일주의' 로 난세 경략

허물 있어도 능력 위주 발탁
 

 국가건 기업이건 사람이 가장 중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걸 제대로 알기도 어렵거니와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 옛날 어느 대통령은 ‘인사는 만사(萬事)’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를 해놓고 막상 인사를 할 때는 엉망으로 하여 실패한 정권을 만들고 종국에는 나라를 벼랑에 몰고 간 사례가 있다.  기업의 흥망도 대개 인사에 좌우된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의 명암이 엇갈렸는데 가장 큰 원인은 인재를 잘 키우고 활용한 쪽과 그렇지 못한 쪽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조조의 위나라가 삼국 중에 가장 강성한 원인도 조조의 성공한 인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조뿐 아니라 촉나라의 유비나 오나라의 손권도 인사를 잘했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조조가 한 발 앞섰다. 의리나 인정에만 호소하지 않고 일할 보람과 안정된 자리, 또 물질적 보상을 해주는 현대적 관리기법을 일찍부터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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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는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잘 쓸 줄 알았다. 사람의 능력과 잠재력을 정확하게 파악해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또 사람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좋은 인재를 보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좋아했다. 더러는 실패한 경우가 있어도 평생 인재 사랑은 변치 않았다. 조조 밑엔 인재가 항상 들끓었다. 정확한 평가를 하고 사람을 길러주고 거기다 사람을 끄는 매력 같은 것도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신상필벌이 엄한 대신 인재라고 생각한 사람에겐 매우 관대한 면도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끌림 같은 것이 있는데 조조에겐 그런 게 있었다. 조조 밑엔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풍부하게 포진해 있었다. 좋은 계책을 내는 참모, 용맹스런 장수, 병참이나 행정에 능한 관료, 글을 잘 쓰는 문장가들이 즐비했다. 이들을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하듯 자유자재로 써서 나라와 천하를 경영한 것이다.   조조 진영도 처음엔 친척들이 중심이 되었다. 다행히도 친척 가운데엔 출중한 무장이 많았다. 조인(曺仁) ·조흥(曹洪) ·하우돈(夏候惇) ·하우연(夏候淵) 등은 당시 일류 가는 무장들이었다.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시작은 했지만 곧 가족회사의 한계를 느낀다. 그때부터 조조는 대담한 외부수혈을 하는데 싸움에 이겨 다른 나라를 점령할 때마다 적군 가운데 좋은 인재를 발탁해 쓴다. 적군뿐 아니다. 황건적이나 산적 가운데에서도 재주가 출중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중용했다. 조조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세상의 평판이 중요해졌는데 그땐 이름 있는 명망가를 간판으로 데려다 놓는다.  



 

조조는 숨은 인재를 발굴해 낼 줄 알았다. 

 재주가 넘쳐 일찍 빛을 발하는 사람은 그들대로, 대기만성형의 둔중한 사람은 그들대로 조조는 잘 골라 썼다. 사마의(司馬懿) 같은 사람은 큰 그릇이기는 하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타입인데 조조는 빨리 알아보고 데려다 쓴다. 처음엔 사마의가 많이 고사했으나 조조의 거듭된 요청에 수하로 들어간다. 만약 조조 밑에 안 갔다간 목숨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 당시엔 출중한 인재를 자기편에 못 끌어오면 차라리 없애버리기도 했다. 적의 편에 가담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사마의를 자기편에 끌어왔기 때문에 위나라는 촉나라 제갈공명의 거듭된 공세를 막을 수가 있었다. 제갈공명도 천재적 군사(軍師)였지만 사마의도 그에 못지않은 전략가였다. 날카로운 공명의 공세를 사마의가 둥글게 잘 막아냈다. 사마의가 없었더라면 제갈공명은 북벌의 꿈을 이루었을지 모른다. 위나라에 행운이고 촉한(蜀漢)엔 통한이다. 공명 때문에 사마의가 그늘에 가려지지만 높은 지략과 안목, 행동력에 있어서 두 사람은 막상막하(莫上莫下)였다. 이런 사마의를 일찍 알아보고 자기 진영에 붙잡아 둔 조조의 안목은 정말 놀랍다 할 것이다.  조조 밑에 사람이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 나섰다. 조조가 56세가 되었을 때 인재를 모으려고 발령한 구현령(求賢令)을 보면 조조의 인재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내용을 보면  “예부터 왕조를 부흥시키거나 치세(治世)를 잘한 황제는 모두 훌륭한 인재의 도움을 받았다. 현인을 발견하려면 윗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현인은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다.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가 아니면 안 된다느니 하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간 언제 현인을 찾을 것인가. 지금 큰 재주를 지녔지만 한가하게 낚시나 하고 있는 강태공(姜太公)이나 형수와 관계를 가졌느니 뇌물을 받았느니 하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고조(漢高祖)의 일등공신이 된 진평(陳平) 같은 인재가 어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초야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라. 오직 능력만으로 천거하라.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을 중용할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난세엔 도덕성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조조의 인재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인재관은 아직까지 중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적 인재관이 바로 그것이다. 명분 위주의 인재관 때문에 나라나 기업이나 유능한 인재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유교적 영향이 강한 한국에선 그 폐해가 지나칠 정도다. 조조는 그런 실용적 인재관을 일관되게 실천한다.   조조의 측근 참모 가운데에 곽가(郭嘉)라는 사람이 있었다. 재주가 뛰어나 조조가 늘 중요사를 의논하고 총애했다. 안목이 높고 머리회전이 빨라 고비 때마다 기발한 타개책을 내놓곤 했다. 그 대신 품행은 별로 방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지식한 어느 대신이 곽가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자주 올렸다. 그때마다 그 대신에겐 엄정한 사람이라 하여 상을 내렸으나 곽가는 계속 곁에 두고 중용했다. 재주는 재주, 품행은 품행이라는 생각이었다. 감격한 곽가가 조조를 위해 더욱 충성을 바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조조는 심지어 유비까지 자기 밑에 두고 싶어 애를 썼다. 유비가 어려울 때 많이 거두어 주었다. 당시는 군웅이 아직 할거할 때였는데 다른 사람은 다 우습게 보아도 유비는 한 몫 놓아 주었다. 천하에 영웅은 조조 자신과 유비뿐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측근 참모들이 유비가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차라리 죽여 후환을 없애자고 건의한다. 그때 조조는 “지금은 인심을 얻어 천하의 인재를 모을 때인데 유비를 죽이면 누가 나에게 오겠느냐”며 말린다. 아무리 애를 써도 유비가 도망을 가자 조조는 호의가 증오로 변해 치열한 보복에 나선다.  



 
 조조가 중용하여 큰 업적을 이룬 사람 가운데엔 다른 주인 밑에 있다가 온 사람이 많다. 그쪽에선 빛을 못 보다가 조조한테 와서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조조 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순욱(荀彧)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유비 밑의 제갈공명에 비유될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조조가 기초를 세울 때 참여해 크고 작은 계책을 내고 또 성공시켰다. 만약 순욱이 발안한 몇 가지 결정적인 헌책이 없었더라면 조조의 패업은 중도에 좌절됐을지도 모른다. 순욱은 애초 조조의 라이벌인 원소(袁紹)에게 갔다가 실망하고 조조 진영으로 옮긴 사람이다. 순욱이 조조 밑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마지막엔 조조와 뜻하는 바가 달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살하고 만다. 조조는 용도가 있을 땐 사람을 지극히 아끼지만 용도가 끝나면 차갑게 대한다. 이 점은 인정 많은 촉나라 유비와 좀 다르다.  난세엔 주인은 신하를 잘 만나야 하지만 신하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그 때 줄을 잘못 서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다.그래서 천하의 인재들은 좋은 주인을 찾아다녔다. 주인의 그릇은 어느 정도인가, 머리는 괜찮은가, 덕은 있는가, 인심은 후한가 등을 따져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상의 평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도 줄서기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IMF 외환위기 이후 큰 기업들의 부침이 갈리면서 어떤 경영자는 감옥에 들어가고 재산 차압까지 당한 반면 어떤 경영자는 스톡옵션 등으로 큰 재산을 모으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때는 재산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었다. 그래서 주인의 사람됨이 매우 중요했다. 순욱이 원소를 버리고 조조를 찾아 왔을 때 조조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 “나의 장자방(張子房)이 왔도다”하고 반긴다. 장자방은 뛰어난 지혜로서 한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창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량(張良)을 일컫는다. 조조는 순욱의 무한한 가치를 잘 알았던 것이다.  


 사실 조조의 최대 고비는 원소(袁紹)와 중원을 놓고 다툰 관도(官渡)의 싸움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최대의 강자끼리 싸운 준결승전 같은 것이었다. 그때 원소의 참모였던 허유(許攸)가 조조에게 투항해 오는 것이 승패의 갈림길이 된다. 허유가 아무리 좋은 계책을 내놔도 원소가 듣지 않자 기밀문서를 가지고 조조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어릴 때 친구 사이였다.  허유는 원소의 군량미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그곳을 급습하라고 일러준다. 당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는 중이라 거짓 정보도 많았다. 그래서 허유의 정보가 적군의 모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다. 조조는 그런 것을 가려내는 데 천부적인 감이 있었다. 틀림없는 정보라 판단해 스스로 기습작전에 나선다. 어름어름하면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만다. 건곤일척의 기습작전으로 원소의 군량미를 불태우고 승기를 잡는다. 그런 승부수를 띄우는 데 있어서 조조는 천재적이었다. 결국 그 때문에 조조는 최후의 승자가 된다. 애초엔 원소가 병력이나 병참, 인재 면에서 앞서 있었다. 그러나 CEO라 할 수 있는 조조와 원소의 능력을 비교할 때 조조가 월등했다. 원소는 유능한 참모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쓸 줄 몰랐다. 대를 이은 명문거족으로서 자만심만 높아 인재를 대접하거나 소중히 생각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환관의 후손으로 늘 몸을 낮추는 자세였다. 많은 인재들이 절망하고 떠났기 때문에 원소는 관도의 싸움에서 패하고 자멸하고 만다. 리더의 무능과 자만심 때문에 도저히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그런 일은 요즘에도 일어난다.  


 원소를 이기고 나서 조조의 큰 그릇이 그대로 드러난다. 조조가 원소의 본영에 도달했을 때 급하게 쫓겨 가느라고 중요문서들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그 가운데엔 원소에게 온 비밀편지 뭉치도 있었다. 부하들이 그걸 조조에게 바치자 두말 않고 불 속에 던져 버린다.  ‘비밀편지를 태우면 누가 원소에게 접근했는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라고 참모들이 말렸더니  조조는 편지가 다 타도록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이제 원소가 망했으니 천하의 사람이 모두 내 사람인데 옛일을 따져 무슨 소용이 있느냐. 원소가 강성할 땐 나도 속으로 두려웠거늘 보통사람이야 오죽했겠느냐’며 손을 털었다 한다. 아마 조마조마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인데 이 광경을 보고 조조에게 다시 한 번 감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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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신경 좀 써야겠네요.!!
밖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요즘은 나른해지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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