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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6) - 조조

조조의 감성리더십


인간적 매력으로 인재 포용

'능력이상' 실력 쏟게 만들어

 조조는 아주 냉철하고 차가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감성적인 면도 풍부하다. 사람을 심복시키고 감동을 주는 데는 감성적 요소가 꼭 있어야 한다. 위대한 경영자는 엄격한 신상필벌과 이성적 판단이 바탕이지만 그 위에 따뜻한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 이른바 인간적 매력이다. 지도자는 아래로부터 존경과 더불어 사랑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와 같은 격변기엔 계산이 잘 안 된다. 따라서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무조건 좋아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요, 노력한다고 될 것도 아니다. 사람의 그릇 또는 마음가짐이며 타고난 성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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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에 의하면 조조는 당시 일급의 지식인이고 또 시인이었다. 조조는 시심(詩心)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심약(心弱)하고는 다른 것이다. 조조는 원칙과 줏대를 세우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를 자주 나타낸다. 그래서 부하들이 조조를 두려워하면서도 따랐던 것이다. 그 대신 조조의 라이벌인 원소는 인정에 끌려 더러 대소완급을 가리지 못했다. 결단도 늦었다. 리더로서 치명적인 약점이다.  조조가 유비를 정벌하러 나가 조조의 근거지인 허창(許昌)이 텅 빌 때가 있었다. 이때 원소의 참모가 좋은 기회이니 허창을 기습하자는 건의를 한다. 원소는 반응이 없었다. 거듭 재촉을 한 즉, 원소는 “사실 내가 가장 귀여워하는 다섯째 아들이 병이 나 지금 군사를 낼 정신이 없소. 다음 기회를 봅시다”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참모는 “하늘이 준 이런 기회를 어린애 병 때문에 놓치다니”라고 땅을 치며 탄식한다. 이런 원소의 심약함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에도 천하의 주인 자리를 조조에 뺏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매우 냉철하다. 장수(張繡)의 기습공격으로 적에게 완전 포위되자 큰아들이 내주는 말을 타고 혼자 탈출하면서 훗날을 기약한다. 큰아들과 조카는 난전 중에 죽는다. 나중에 통쾌한 복수를 하지만 그때도 아들이나 조카가 죽은 것은 뒷전이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장렬히 죽은 호위대장 전위(典韋)를 위해 더 섧게 통곡한다.  조조는 진정으로 전위를 좋아하고 또 아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전위에게도 전달되어 조조를 위해 기꺼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런 광경을 보고 병사들은 감동한다. 



 오늘날의 기업 경영에도 그런 감성적 요소가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심복시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위대한 경영자를 만나보면 선이 굵으면서도 무척 세심함을 느끼게 된다. 이른바 대담소심(大膽小心)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일할 땐 서릿발 같은 분위기를 만들지만 사적인 일엔 무척 자상했다. 무슨 보고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꼭 밥 먹고 가라고 붙들었다. 회장을 모시고 식사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기 때문에 모두 사양하고 그냥 가려하면 “때가 되었는데 그냥 가는 게 아니다”라며 밥을 먹고 가게 했다.  옛날 모두 어렵게 살던 시절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여 보내던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과일 같은 것도 먹으라고 한 쪽 씩 집어 주곤 했다. 현대 정주영 회장도 회식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과 같이 노래 부르고 춤도 추면서 분위기 맞추는 것을 많이 보았다. 명절 땐 시차에도 불구하고 해외건설 현장에 꼭 전화를 걸어 격려했다 한다. LG 구인회 회장은 새벽에 공장을 찾아와 철야한 사람들을 보고 “잠 좀 잤나. 욕본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다. 욕본다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
로 고생한다는 뜻이다. 


 헨리 포드톰 왓슨, 혼다 쇼이치로(本田宗一郞),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朗) 같은 위대한 경영자들도 대담하고 합리적인 경영능력과 아울러 뛰어난 감성을 발휘하곤 했다. 그런 탁월한 감성이 없으면 보통 경영자는 몰라도 위대한 경영자는 결코 될 수 없다. 기업은 결국 사람인데 정말 반해서 미치도록 따르는 사람 없이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감성 리더십은 타고난 것이라 볼 수 있다. 타고난 성품에다 부단한 내공을 거쳐 형성되는 것이다. MBA 과정이나 교과서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보고 고생 끝에 터득하는 것이다. 격변기를 거친 우리나라 창업세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남이 자기에게 반하게 하려면 자기가 먼저 사람에게 반해야 한다. 조조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천부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조조가 원소에게 이기고 전쟁 뒤처리를 하는 자리에서다. 원소의 참모로서 전쟁 초에 조조를 비난하는 격문을 썼던 진림(陳琳)이 잡혀왔다. 그 격문은 명문장이었으나 조조에겐 매우 아팠다. 환관 출신인 조조 집안의 약점을 까발리면서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조조가 매섭게 물었다. “격문을 썼으면 썼지 어찌 그렇게 모질게 썼느냐.” “제가 하는 일은 화살과 같아서 시위에 올려진 이상 날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측근들이 승상의 집안을 욕했으니 죽여 본보기를 삼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조조는 “나만 욕했으면 됐지 우리 조상까지 욕할 건 없지 않았느냐. 앞으론 나를 위해 네 좋은 재주를 써라”하며 용서해주고 자기 참모로 삼았다. 진림은 당대의 문장가로 세상이 알아주던 지식인이었는데 그 뒤 조조를 위해 충성을 다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지식인 사회의 인심과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조조는 곽가(郭嘉)의 재주를 아껴 크게 총애했다. 곽가를 만나보고 조조는 내 더불어 천하를 도모할 사람을 만났다고 기뻐한다. 곽가 역시 내 뜻을 알아줄 진짜 주인을 만났다고 좋아한다. 그 곽가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곽가의 주검 앞에 선 조조는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통곡한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고 “여러분은 나와 같은 연배이고 곽가는 한 세대 젊어 우리의 앞날을 부탁할까 했는데 이제 그가 갔으니 누구에게 부탁할꼬”하고 크게 탄식한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목숨만 겨우 붙어 형주로 도망 갈 때다. 그 절박한 패주(敗走) 길 속에서도 씩씩하던 조조가 안전지대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자마자 크게 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를 묻자 “곽가가 있었으면 나를 이토록 참패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다시 우는 것이었다. 주위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한다. 


 조조가 원소군을 격파한 뒤 그 잔당을 쫓아 멀리 오랑캐 땅으로 원정을 갔다. 그때 조홍(曹洪) 등이 그걸 말렸다. 그러나 조조는 정벌을 강행해서 겨우 이기고 돌아왔다. 혹한에 양식이 떨어져 병사들이 큰 고생을 했다. 개선을 축하하자 조조는 “이번 싸움에서 비록 이겼다 해도 그것은 요행이지 이치에 맞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싸움을 말린 너희가 옳았다. 앞으로도 옳은 일은 서슴지 말고 말하라”면서 조홍에게 큰 상을 내렸다. 


 조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능력 이상의 힘을 내게 하는 천부적 능력이 있었다. 적벽대전 전 형주성에 무혈입성할 때도 형주 명사 괴월을 보자마자 “내가 형주성을 얻은 것보다 그대를 얻은 것이 더 기쁘다”고 말해 괴월을 감격케 했다. 조조가 유비를 정벌하러 갔다가 허창으로 돌아가면서 고향땅 초현(縣)을 찾은 적이 있다. 고향을 둘러봐도 아는 얼굴이 적었다. 오랜 전란 때문에 많이 죽고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는 유명한 포고령을 내린다.  ‘내가 의병을 일으킨 이래로 나를 따라다니다가 죽은 장사가 있으면 그 자녀에게, 자녀가 없으면 가까운 친척에게 논밭을 나누어 주고 그 자녀들에겐 학교와 선생을 두어 공부를 시키도록 하라'  또 먼저 간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도록 했다. 조조는 그 포고령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조는 고향 사람들을 감격시키면서 부하 장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바로 자신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원소가 죽자 무덤을 찾아 제사를 드리곤 슬피 울었다. 원소의 미망인에겐 곡식과 비단을 내려 뒤를 돌봐주었다. 비록 길이 달라 싸우긴 했지만 옛날 정의를 소중히 여긴 것이다. 그것을 조조의 뛰어난 연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런 연기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 한 가닥 정성이 있어야 한다. 거짓말도 성심성의를 다해야 통한다는 말이 있다. 조조가 유비의 의형제인 관우(關羽)에게 들인 정성은 눈물겨울 정도다. 조조는 관우를 잘 보고 특히 탐을 냈다. 관우의 뛰어난 무용뿐 아니라 굳은 의리와 곧은 처신을 좋아했다. 어찌 보면 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조와 유비가 싸우게 되어 유비는 도망가고 관우는 유비의 가족과 함께 남게 되었다. 관우가 산 위에서 겹겹이 포위되어 최후로 한바탕 싸우고 죽으려 할 때 조조는 관우와 친한 장요(張遼)를 보내 간곡히 산을 내려올 것을 권한다. 조조는 관우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관우가 완강히 거절하지만 유비의 가족을 들먹이자 마음이 약해져 3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하산하겠다고 말한다.   첫째는 한(漢)나라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
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는 유비 가족에 대해 후한 예우를 해 달라는 것, 셋째는 유비가 있는 곳을 알면 언제든지 찾아 떠나겠다는 것이다. 항복하는 입장으로서 무리한 요구지만 조조는 수락한다. 조조의 통이 컸다고도 볼 수 있고 그만큼 관우를 좋아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조조는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한다. 많은 재물을 내리고 자주 불러 마음을 달랜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그럴수록 조조는 더욱 관우를 좋아하게 된다.  특히 관우의 의연하고 엄정한 생활태도를 보고 존경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관도(官渡)의 싸움이 일어나 관우가 원소의 맹장 안량(顔良)·문추(問醜)를 베는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 관우는 유비의 소식을 듣고 떠날 작정을 한다. 그동안 조조에게 받은 재물들을 모두 봉해 놓은 다음 하직인사를 하러 승상부로 간다. 조조는 관우를 붙잡아 두기 위해 면회사절 팻말을 걸어 놓는다. 

 몇 번 허탕을 친 관우는 편지를 써놓고 길을 떠난다. 도저히 잡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조조는 막료들을 데리고 급히 전송에 나선다. 작별 선물로 비단으로 지은 전포(戰袍) 한 벌을 전하면서 “천하의 의사(義士)를 내 복이 적어 붙잡아 두지 못하는구려”하며 거듭 애석해 한다. 조조는 돌아오는 도중에도 내내 “내 정성이 모자랐다”고 탄식해 마지않아 막료들을 감동시켰다. 이런 정성이 어찌 관우에게 전해지지 않겠는가. 나중에 관우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조조를 자기 체면을 걸고 살려 보낸다. 삼국지의 빛나는 장면이다. 



출처 :  포브스 코리아 정기구독 중 발췌.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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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입니다.
예전 배우 장국영이 거짓말처럼 자살했던 일이 기억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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