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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8) - 조조

조조의 시스템구축과 법치 

둔전제로 부국강병 기틀 마련준법에 솔선

나라 기강 세워



 조조가 그렇게 빨리 두각을 나타내고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대에 맞는 시스템을 빨리 만들고 그걸 앞장서서 정착시킨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전략적 창조성이 매우 풍부하고 실천력이 있었다. 라이벌이던 유비나 손권이 따라가기 힘든 점이다. 싸움 잘하는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정치가요, 행정가였다. 그 시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며 백성들이 무얼 원하는지를 동물적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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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생활 안정이었다. 계속된 전란 때문에 백성들은 안전한 삶터와 생업을 바랐던 것이다. 마침 조조 밑에 있던 조지(棗祗), 한호(韓浩) 등이 둔전제(屯田制)를 건의한다. 둔전제는 전란으로 버려진 농토를 나라에서 모아 백성들에게 농사용으로 빌려주고 수확량의 6할(자기 소가 있으면 5할)을 징수하는 국영 소작제도다.   한나라 초기에 변방에서 군인들이 식량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농사를 지은 사례는 있었지만 내지에서는 없었다. 당시 전쟁으로 주인 없는 농토가 많았고, 고향을 떠난 난민들도 많았는데 나라에서 이 둘을 묶어 농사를 짓게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게 아니지만 당시 전란 속에서 그걸 착안했다는 게 대단한 일이다. 먹는 것은 강한 군사의 기반이 된다. 잘 먹여야 군사들이 잘 싸우게 되는데 그 많은 군량을 조달하는 것은 당시 군웅들의 큰 골칫거리였다. 조조는 그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을 찾았던 것이다. 이른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선순환 구조다.  좋은 아이디어는 받아들이고 즉각 실행하는 것이 조조의 위대한 점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아이디어가 계속 올라오고 부하들이 신나게 일할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둔전제를 처음엔 도읍지인 허창(許昌) 부근에서 실시해 보니 첫 해에 100만 석의 식량이 증산되었다 한다. 그 뒤 지역을 점차 넓혀가자 5년 뒤에는 전국의 곡창이 꽉 찰 정도로 식량이 풍부해졌다. 또 전선의 군인들도 농사를 짓게 했다. 군인들이 농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니 군량미가 자급자족이 되고 식량을 비축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10만의 군대를 유지하려면 1년에 약 600만 석을 필요로 했으며 10만 명이 움직이려면 약 1,000대의 보급수레가 뒤따라야 했다 한다. 당시의 도로 사정에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조조는 풍부한 식량을 각지에 쌓아두고 가까운 데서 갖다 쓰게 하니 군대의 기동력도 매우 좋아졌다. 농사를 지으려면 둑을 쌓고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야 했다. 전쟁을 하지 않을 때 군대를 동원해 그 일을 하게 하니 토지의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다.  당시 군대의 수는 총인구와 식량을 어느 정도 생산할 수 있느냐에 많이 좌우되었는데 위나라가 약 20만~30만 명, 오나라가 15만 명, 촉나라가 7만~8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런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삼국이 비슷하게 싸운 것은 수송능력으로 인해 병력의 집중투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조가 적벽대전 때 100만 명을 동원했다고 되어 있는데 당시의 인구와 수송사정으로 볼 때 그것은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둔전제 덕분으로 풍부한 식량과 강한 군대를 확보,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시스템을 처음으로 만들고 작동시키는 일은 위대한 창업자의 몫이다. 



 
 삼성의 이병철(李秉喆) 회장과 LG의 구인회(具仁會) 회장은 6 ·25전쟁 때 피난지 부산
에서 설탕 공장과 화장품 공장을 만들어 삼성과 LG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도
약대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쉬운 일 같지만 당시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제
조업에 착수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땐 주로 승부가 빠른 무역업을 했
고 거기서 많은 재미를 봤다. 다른 기업들이 그 재미를 즐기고 있을 때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것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당한 선견력과 결단을 필요로 했다. 삼성이 설탕 공
장을 건설해 정상가동하기까지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공장이 돌아가자마자 아침
에 설탕 포대를 실어내면 저녁에 그만큼 돈 포대를 싣고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 만큼
이익을 올렸다 한다. 서로 성 뺏기 싸움에 여념이 없을 때 과감히 둔전제를 시행해 식
량 문제를 해결한 것이나, 남들이 단기 승부의 무역업에 매달릴 때 제조업에 과감히
진출해 큰 이익을 올린 것이나 발상은 비슷하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어느
소송에 걸려 법원에 가서 한 말이 있다. 포드자동차가 너무 많은 이익을 올리지 않느
냐는 질문을 받았다. 
포드는 “회사 경영방침대로 하다 보니 돈은 저절로 벌리더라”고
 말했다. 그 경영방침이란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고임금 고능률(高賃金 高能率)로 고
용하고 자동차의 판매가격을 낮춰 많은 사람이 싼 가격에 차를 살 수 있게 한다는 것
이었다. “그러면 누구나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포드는
 “그 모든 일을 해낸다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해내기가 쉽
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즉 돈 버는 시스템을 만들면 되지만 그 시스템 만드는 일
이 어렵다는 것이다.
 



 
   
조조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가만히 보고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부단히 손질하고
 고쳤다. 스스로 아이디어도 많이 냈다. 원소와 싸울 땐 돌을 발사하는 발석차(發石車)
라는 기계를 만들어 큰 효험을 봤다. 또 도로나 다리를 건설할 때 설계에 직접 간여하
거나 세부적인 지시를 하기도 했다. 사실 위대한 창업자들을 보면 의외로 세심한 점
이 뭅? 큰 방침을 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세심한 것까지 신경을 쓴다. 조조
가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 조조는 땀을 뻘뻘 흘리며 대장장이들과 같이 칼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한다. 참모가 곁에서 보고 “주공은 큰 일이나 하시지 그렇게 대장장이 일
까지 하십니까”하고 말한즉 “큰 일도 잘하고 작은 일도 잘하면 좋지 않은가”라며 하
던 일을 계속 했다 한다.  
조조는 전쟁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백성들이 뭘 원하는지를 잘 알아 항상 선수를 쳤다. 조조가 최대의 라이벌인 원소를 쳐부수고 기주(冀州) 지방을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원소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두어 원성이 높았는데 조조는 이것을 대폭 경감하는 조치를 취한다. 특히 세금의 폐해가 심했던 황하 이북의 백성들에겐 1년간 세금을 면제하기도 했다. 백성들이 좋은 주군을 만났다고 크게 환호했다 한다. 조조는 나라경영에 있어서 법에 의한 치국을 기본으로 삼았다. 법치주의와 부국강병책은 촉나라 제갈공명의 통치방법과 비슷한 점이 많다.  


  조조는 젊었을 때부터 원리원칙을 따지고 법 집행에 엄격했다. 황건적을 진압한 공
으로 제남(濟南) 지방의 책임자로 갔을 때의 일이다. 지방 관리들이나 호족들의 횡포
가 심했다. 중앙의 권력자들과 줄이 닿아 있어 전임자들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조
조는 한 번 기강을 잡기로 결심한다. 은밀히 비위를 조사해 10명의 현령 가운데 8명
을 파면한다. 조조의 기세에 놀란 그들이 혼비백산 도망쳤다. 그들도 중앙에 배경이
있었지만 조조도 만만찮은 배경이 있었다. 조조의 아버지도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큰 힘이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조조의 관내는 매우 평온해졌고, 그의 명성은 크게 올라
갔다. 조조가 30세 때의 일이다. 


  조조는 나라를 다스릴 때 법을 원칙 없이 자의적으로 집행해선 안 된다며 부하들을
심히 단속했다. 당시 강직하기로 이름난 만총(滿寵)을 불러 법 집행을 맡겼다. 만총은
조조의 친척이며 실력자인 조홍(曹洪)과 가까운 사람이 법을 어기자 두말 않고 투옥
해 버렸다. 조홍이 몇 번 부탁을 해도 만총이 듣지를 않으니 할 수 없이 조조에게 호
소했다. 조조가 관계자들을 부르자 만총은 석방하란 소리를 할까봐 서둘러 죄인을 죽
여 버렸다. 조조가 이 일을 알고 “조홍에게는 안됐지만 법을 집행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 한다”면서 만총을 칭찬했다 한다.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갈 때 군기를 엄하게 단속했다. 한번은 수확철에 행군을 하면서 백성들이 지어놓은 농사를 짓밟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조가 타고 있던 말이 꿩 소리에 놀라 밀밭을 밟아 버렸다. 조조는 법무 참모를 불러 규정을 물었다. 지휘관은 귀한 신분이므로 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답변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조조는 내가 명령을 내려놓고 내가 어겼으니 내 목을 잘라야 하나 총지휘관인 내가 자살할 수는 없는 것이니 대신 자르겠다면서 정말 칼을 빼어 머리털을 잘라 던졌다. 그걸 보고 부하들이 크게 조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극 같지만 그런 순발력 있는 행동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조조는 능력있는 사람은 과감히 발탁하는 대신 실패한 사람을 벌주는 데도 매우 엄격한 법을 적용했다.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수를 지방장관으로 발탁했는데 이에 대해서 말이 많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갔다. 조조는 “명령을 내려 출정시킨 이상 공적을 올린 자에게 포상을 내리면서 죄가 있는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불공평하다. 출정한 장수 가운데 패전한 자는 군법에 의거하여 처벌하고 손실을 가져 온 자는 관직과 작위를 몰수한다”고 공포한다. 당시 장수가 전장에서 패배하면 목이 잘리는 경우가 많았다. 적보다 군법이 두려워야 목숨을 안 아끼고 싸우게 되기 때문이다. 전란 틈에서 갑자기 출세한 사람도 많았지만 한순간의 실패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조조가 법 집행에 엄격하니 부하들도 자연 따랐다. 한번은 조조가 밤에 침실에 들었
는데 조조의 사촌동생이면서 남부 전선 사령관으로 있는 조인(曹仁)이 찾아왔다. 조조
의 신임이 두터운 막강한 실력자였다. 그냥 들어가려 하자 호위대장 허저(許)가 가로
막았다. 조인은 “이 사람아 날세, 나 조인이야”하고 그냥 들어가려 했다. 허저는 “잘 알
고 있습니다, 조인 장군. 아무리 주공의 친척이지만 장군은 외지파견 대장이시고 저는
 호위대장이니 함부로 들여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내일 낮에 다시 오시지요”했다 한
다. 자다가 그 소리를 들은 조조는 “허저는 정말 충신이로구나” 하고 더욱 신임했다
 한다. 이렇게 뒷받침을 해주니 부하들도 제 할 일을 소신껏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법을 엄격히 시행했지만 조문에 얽매어 경직되게 하지는 않았다. 조조가 원
소의 아들 원담(袁譚)을 정벌할 때다. 그때 백성들을 징발하여 강의 얼음을 깨고 배를
 끌고 가게 했는데 그 일이 힘들어 도망가는 사람이 많았다. 조조는 명령을 내려 이들
을 잡아 처단하라고 했다. 얼마 후 많은 사람이 조조를 찾아와 자수했다. 그때 조조는
“내가 너희를 봐준다면 군령을 어기는 것이요, 너희를 죽이면 자수한 자를 죽이는 것
이 된다. 돌아가 꼭꼭 숨어 지내면서 관리들에게 잡히지 말라”고 했다 한다. 법적용에
있어서 강자엔 엄했지만 약자에겐 상당히 신축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조조는 아들들에게도 엄격히 대했다. 아들이라 하여 집에서 호의호식하거나 할 일
 없이 노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며 호된 경험을 하게 하고, 각
기 능력에 따라 벼슬과 직책을 주었다. 조조가 61세 때 세 아들을 각기 지방으로 내보
내면서 내린 훈시를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이제 너희를 각기 따로 보내 지방을
감독하고 다스리려 한다. 아들이란 비록 어릴 때에는 사랑을 받을지라도 커서는 능력
과 인품을 두루 갖춰야만 쓰일 수 있다. 나는 두 말 하지 않겠다. 신하들에게도 사사로
이 치우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들들에게도 사사로이 치우친 정을 품지 않을 것이
다.” 아들과의 관계를 부자 사이로만 보지 않고 공적 관계로 파악해 적자생존을 강조
한 것이다. 


  이렇게 조조는 법에 따라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조조가 다스리던 나라는 기강이 잡
히고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그런 법가적(法家的) 통치 방식을 견지
했다. 조조는 죽기 직전 “나는 법령을 엄격히 집행했는데 그건 옳았다. 그러나 내가 부
렸던 작은 분노나 큰 잘못을 배워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조조는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뿐만 아니라 장래를 대비하는 일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바로 교
육과 문화정책이다. 조조는 전란으로 나라의 예의범절과 청소년 교육이 무너지는 것
을 우려해 그 쪽에 특히 신경을 쓴다. 각 지방에 포고를 내려 500호마다 학교를 설치
해 장래성 있는 청소년들을 교육하도록 지시한다. 또 사적 복수를 금지하고 관혼상제
에 있어 호화 사치를 엄히 단속한다. 검소한 생활은 조조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 딸이
황제에게 시집갈 땐 혼수를 간소하게 하도록 지시하고 딸려 보내는 하녀도 10명으로
줄였다 한다. 
아주 흥미로운 일은 음해나 중상을 엄히 단속하는 포고를 내려보낸 점
이다. 45세 때 조조는 “전란 이후 미풍양속이 많이 약화되었다. 남을 헐뜯거나 수군거
리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옛날 일에 대해 어느 말도 하지 말라. 옛날 일을
 수군거린 죄에 대해서는 엄한 벌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했다. 또 익명으로 허위 사실
을 꾸며내 남을 비방한 데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해 처벌토록 했다.  


  조조는 문화 창달에도 힘을 썼다. 스스로 시인이기도 했던 조조는 당시 재주 있는
문인들을 휘하에 많이 끌어 모아 각기 재능을 발휘하게 했고, 그들에겐 어느 정도 언
론자유도 허용했다. 이들이 바로 중국 문화의 한 번성기를 이룬 건안문단(建安文壇)을
 형성한다. 조조의 자작시도 많이 남아 있는데 웅장하고 서정성이 넘쳐 매우 높은 경
지라 한다. 조조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지만 학문을 좋아해 독서도 많이 하고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조조뿐만 아니라 아들인 조비(曹丕) ·조식(曹植)도 당시 일류시인이
요, 지식인이었다. 


출처 : 포브스닷컴(심층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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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옮겨 적는 게 참 고역이네요.
감기 걸려서 몸이 말이 아닙니다. 그나마 1달 일찍 걸려서 다행이에요.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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