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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삼국지 경영학 (9) - 조조


조조의 ‘관도대전’ 승부수 



운명의 갈림길 재빨리 포착

전략과 결단으로 강적 격파

 


 조조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패업을 이룩한 데는 건곤일척의 승부수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하북(河北)의 패자 원소(袁紹)와 자웅을 겨룬 관도(官渡)의 대전이다. 이 관도대전에서 승리했기에 조조의 앞길은 활짝 열렸다. 만약 참패했으면 조조 세력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중국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관도의 싸움에 지고 나서 황하(黃河) 북쪽에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원소도 2년이 안 돼 죽었고, 그 넓은 영토도 모두 조조에 흡수되고 말았다. 조조로 보면 작은 것이 큰 것을 집어삼킨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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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의 세력이 더 미약했을 때 원소는 몇 번이나 자기 세력권으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조조는 그것을 단연 거부하고 세력을 점차 길러 원소와 맞붙은 것이다. 원소를 뛰어넘지 못하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적은 병력으로 한 번 승부수를 던진것이다. 소설 삼국지에선 조조가 손권 ·유비 연합군에게 참패한 적벽대전을 하이라이트로 치고 있으나 사실은 관도의 대전이 삼국지 판도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적벽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조조의 천하통일 구상이 차질을 빚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조나 위나라가 존망의 위기로 몰린 것은 아니다.  


  위대한 창업자는 한 번은 모든 것을 걸고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것이 성공하면 살아남아 웅비할 수 있지만 실패하면 세력의 몰락은 물론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 평소 신중해야 하지만 일단 때가 오면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질 필요가 있다. 먹고 먹히는 싸움에선 때를 잘 보고 결단이 빨라야 하는 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힘센 쪽에 붙든지 아니면 결연히 싸우든지 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엉거주춤하다 보면 결국 망하고 만다. 삼국지에서도 한때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공손찬(公孫瓚) ·유표(劉表) 등이 결단을 미루다 멸망한다.



 
기업 경영에서도 승부수를 던질 때가 꼭 온다. 이땐 결코 계산만으로는 안된다. 승패는 하늘에 맡기고 전력투구하는 수밖에 없다.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에서 나오고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있는데, 세계적인 기업들을 보면 몇 번이나 큰 승부수를 던져 살아남은 것들이다. 마치 하늘의 조화로 하나의 위대한 기업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 예이다. 삼성의 반도체와 통신기기 진출, 현대의 조선사업과 주베일 항만 프로젝트, LG의 전자사업과 여수 정유공장 건설, 선경의 유공(油公) 인수와 통신사업 진출 등이 대표적이다.  




  관도대전을 보면 천시 ·지리 ·인화가 어우러져 조조란 영웅을 만들어 가는 감을 준다.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와 원소는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 두 사람이 젊었을 때는 친구였고 반(反)동탁(董卓)군을 일으켰을 때는 동지였으나 중원을 놓고 언젠가 한 번은 자웅을 겨루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영토나 군사 수에서 원소가 앞섰다. 천하의 명성도 원소가 위였다. 조조군이 유리한 점은 지휘관인 조조가 원소보다 훨씬 유능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CEO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땅의 넓이나 군사 수도 CEO의 능력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조조는 관도대전을 진두지휘하여 승리로 이끈다. 전략 ·전술적 안목은 물론 참모의 활용, 일선지휘 능력에 있어 탁월한 창조성과 신축성을 발휘한다. 거기에 비하면 원소는 한참 떨어진다. 명문가 출신으로 일찍부터 떠받들려 살았기 때문에 고정관념에 얽매이고 융통성이 없는지 모른다. 귀가 얇고 주관이 없었다. 오늘날 실패한 2세 경영인 가운데에서도 그런 유형을 많이 볼 수 있다. 몇 번이나 승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거나 결단이 늦어 놓치고 만다. 원소는 이기게 되어 있는 싸움에 진 것이다.  



  조조는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조조는 천하의 한가운데, 즉 중원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패업을 노리는 군웅들의 목표가 되었다. 남쪽엔 강동의 패자 손책(孫策), 형주(荊州)의 유표(劉表), 남양(南陽)의 원술(袁術), 완성(宛城)의 장수(張繡), 서쪽엔 서량(西)의 마등(馬騰) ·한수(韓遂), 동쪽엔 여포(呂布)와 유비(劉備)가 있어 호시침침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관도대전 전에 이런 적대세력의 상당 부분이 정리된다. 저절로 된 것도 있고 조조의 전략에 의해 해결된 것도 있다.  당시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던 여포는 어리석음 때문에 조조에게 잡혀 죽고, 장수는 조조에게 귀순했다. 유비는 조조에게 참패해 근거지를 잃고 원소에게 도망가 있었다. 원술도 황제를 자칭하다 천하의 인심을 잃어 멸망한 뒤였다. 마등 ·한수는 경거망동을 못하게 미리 손을 써 놓았고, 유표는 너무 늙어 적극성이 없었다. 가장 위협 세력은 손책인데 실제 군사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원소와의 결전에 앞서 조조는 화전(和戰) 양면작전으로 없앨 것은 없애고 달랠 것은 달랜 것이다. 먼저 유비 정벌에 나선다. 조조가 유비를 치려 할 때 주위에선 말린다. 유비는 작은 세력이니 서둘 것이 없고 유비를 치러 간 사이에 원소가 쳐내려 오면 낭패라는 것이다. 이때 조조는 몇 수 앞을 더 보는 판단을 한다. “유비가 지금은 세력이 보잘 것 없지만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원소는 생각은 많으나 결단이 늦어 허창(許昌)을 비워도 결코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조조는 원소의 그릇과 성격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조조의 예언대로였다. 조조가 근거지 허창을 비우고 유비를 소탕하는 동안 원소는 꼼짝하지 않았다.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조조의 토벌전으로 유비의 추종세력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족들은 조조의 포로가 된다. 관우(關羽)도 후한 조건으로 조조에게 항복하여 유비의 가족들과 함께 허창으로 간다. 관우의 무용과 인품을 탐낸 조조가 일부러 살려서 데리고 간 것이다.  



  조조는 골칫거리인 장수 문제도 해결한다. 그동안 장수는 위나라 남쪽에 자리 잡아 조조를 많이 괴롭혔다. 한때 조조에 항복했다가 불시에 돌아서서 조조 진영을 기습하는 바람에 조조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이때 조조는 아들과 조카를 난전 중에 잃었다. 조조로 보면 이가 갈리는 원수였다. 그 장수를 조조가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관도대전을 앞두고 천하의 군웅들은 조조와 원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원소의 세력이 훨씬 강대했다. 장수는 당연히 원소 편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장수도 그럴 작정이었다. 이 때 천하의 모사(謀士) 가후(賈)가 등장한다. 가후는 삼국지에서 최상급의 전략가지만 이땐 장수에게 몸을 기탁하고 있었다. 가후는 장수에게 조조편에 설 것을 권한다. 지금 원소는 군사가 많고 강성하니 장수군이 가담해도 별로 반갑지 않지만 조조군은 궁핍한 형편이니 매우 고마워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옛 원한도 있는데 과연 받아주겠느냐고 묻자  "조조는 천하를 노리는 사람이니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을 것" 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과연 조조는 장수를 반갑게 맞아 높은 벼슬을 주고 후대한다. 조조로선 큰 근심을 없애고 군사를 보탠 것이지만 옛일을 생각할 때 여간 큰 포용력과 배짱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조조는 가후의 명성을 일찍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장수 이상으로 환대한다. 과연 장수와 가후는 관도대전에서 조조를 위해 큰 공을 세운다. 천하의 인재 가후는 조조 밑에서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뜻과 재주를 편다. 신기하게도 조조 밑에만 가면 사람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조조가 관도대전에 이기고 천하의 패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관도의 싸움에서 몇 번이나 원소에게 승기가 있었다. 처음 양 진영이 대치했을 때만 해도 양적으로는 조조가 불리했다. 이때 원소가 동원한 군사는 10만 명이 조금 넘었다 한다. 원소는 오랜 라이벌이던 북쪽의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그의 유명한 기마군단을 흡수했다. 북쪽 출신들이라 군사는 용맹하고 양식은 넉넉했다. 당시 원소는 황하 이북의 기주(冀州) ·청주(靑州) ·유주(幽州) ·병주(幷州) 등 4주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인구도 많고 물자도 풍부했다. 조조는 예주(豫州)와 연주(州) 등 2주와 서주(徐州) 일부가세력권이었다. 원소가 군사를 일으켜 여양(黎陽)에 집결하자 조조가 북쪽전선인 관도에 동원한 군사는 2만 명 정도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남부와 서부전선에도 병력을 남겨 두어야 했다. 원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때 양쪽 진영의 인물들을 보면 원소 진영엔 안량(顔良) ·문추(文醜) ·장합(張合) ·고람(高覽) ·순우경(淳于瓊) 같은 무장과 전풍(田豊) ·저수(沮授) ·허유(許攸) ·곽도(郭圖) ·심배(審配) 등 모사가 있었다. 조조진영의 무장으론 하후돈(夏候惇) ·장요(張遼) ·우금(于禁) ·조홍(曹洪) ·허저 ·서황(徐晃) 등이 있었는데 나중에 관우도 객장으로 참전한다. 모사로선 순욱(荀彧) ·정욱(程昱) ·곽가(郭嘉) ·가후 등이 있었다.  



 
병력 면에서는 조조가 열세이나 무장이나 모사들은 한수 위였다. 더욱이나 조조군은 통일된 전략 아래서 유기적으로 움직인 데 비해 원소 진영은 전략도 모자라고 단결도 안 되었다. 순전히 총지휘관인 원소의 불민과 우유부단 탓이다. 원소는 싸움도 하기 전에 지구전을 주장한 모사 전풍을 옥에 가두고 저수를 직위해제시킨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포용 못하고 참모들 간의 경쟁과 이견을 조정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 기업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오너가 감정이 앞서거나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이 없으면 옳은 말 하는 사람이 소외되고 말꾼만 득세하게 된다. 그런 분위기가 한 번 형성되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사세가 기울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원소는 초전에서부터 조조의 전략에 말린다. 원소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먼저 조조군의 최전선 보루인 백마성을 공격하자 조조는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후방을 치려는 모양을 보인다.  원소가 놀라 군사를 나누어 대응하자 조조군은 경기병을 동원, 백마성으로 급히 달려가 적을 격파하고 부대를 철수시킨다. 이 백마성 전투에서 관우가 원소의 선봉장 안량의 목을 베는 공을 세운다. 소설 삼국지에선 관우는 후에 안량의 원수를 갚으러 온 원소의 맹장 문추도 죽여 조조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것으로 되어 있다. 조조로선 관우를 항복시켜 극진히 보살핀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 할 것이다.  



  조조가 서전에 몇 번 이겼다 해도 원소의 세력이 워낙 강성해 여전히 고전이었다. 그래도 뛰어난 용병술과 기동전략, 또 발석차(發石車) 같은 최신무기로 병력 열세를 메워가며 선전을 한다. 그러나 초봄에 시작된 전투가 가을이 되자 병참이 문제가 되고 무엇보다 식량이 모자랐다. 양쪽이 마찬가지였지만 조조가 더 심각했다. 조조군은 군사수도 적은 데다 부상자와 탈주병이 많았다. 조조는 너무 어려운 나머지 근거지인 허도(許都)로 철수해 그쪽에서 결전을 벌일 생각도 했다.  그래서 허도에 남아 지키고 있던 순욱에게 밀서를 보내 뜻을 묻는다. 순욱은 지금이 마지막 고비이므로 이것을 잘 넘겨야지 후퇴하면 끝장이라는 답신을 보낸다. 장기전에 괴롭기는 원소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오히려 원소의 군사가 많으니 식량 사정도 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허도 부근에 있던 식량을 전부 끌어모아 보내면서 넉넉잡고 한 달만 버티면 전기가 생겨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 답신에 조조는 용기를 얻어 병사들에게 이제 보름 안에 승리할 방안이 있으니 더 이상 고생은 안 시킬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런 지휘관의 확신은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사실 조조는 몰랐지만 이때 원소는 결정적 승리의 카드를 쥐고 있었다. 원소의 참모가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우세한 군사를 일부 떼어 조조의 후방인 허도를 기습하자는 안을 내놓는다. 만약 그랬으면 조조군은 큰 혼란에 빠져 방어선이 붕괴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원소는 전통적인 공성전만을 고집한다. 그 뒤 식량이 다 떨어졌으니 빨리 보내라는 조조의 밀서를 원소의 참모 허유가 입수한다. 허유는 그 밀서를 보이며 조조의 보급 루트를 공격하자고 건의한다.  허유는 어릴 적 조조의 친구였는데 이땐 원소 편에 있었다. 꾀가 많은 대신 욕심이 많고 행실이 고르지 못했다. 이때 마침 후방에서 허유의 아들이 부정을 저질러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원소는 집안 부정도 못 다스리는 주제에 무슨 건의를 하느냐면서 허유를 꾸짖어 내보낸다. 허유는 원소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날 밤 조조 진영으로 가 투항해 버린다. 조조는 재주만 있으면 행실은 안 따진 데 비해 원소는 결벽증이 있어 유능한 사람을 놓친 것이다.  



 
허유가 찾아 왔다는 소리를 듣고 조조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긴다. 조조는 이때 허유가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허유가 밀서를 내놓고 허도 기습계획을 이야기 하자 조조는 깜짝 놀란다. 그렇게 되었다면 자기는 꼼짝없이 원소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온 건 하늘의 뜻이라며 원소를 깰 방안을 묻는다. 허유는 원소의 군량이 부근 오소(烏巢)에 쌓여 있고 방비가 부실하니 거기를 급습하라고 일러준다. 조조는 즉각 5,000명의 정병을 뽑아 떠날 채비를 한다. 주위에서 혹시 원소의 모략에 말려드는 것이 아닐까 하여 만류하지만 조조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기습공격에 나선다.  



 
긴요할 때 빠른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조조의 특징이고
천재성이다.
물론 원소의 기습에 대비해 빈틈없는 대비책도 잊지 않는다. 이 기습작전은 기가 막히게 성공해 원소군은 총붕괴되고, 원소는 겨우 목숨만 부지해 도읍지인 업도(都)로 도망간다. 병력은 적었지만 조조의 천재적 전략과 신출귀몰한 용병술이 가져 온 완벽한 승리다. 조조에겐 또 하나의 큰 도움이 있었다. 만약 강동의 손책이 죽지 않고 애초 구상대로 군사들을 이끌고 허도로 쳐들어왔더라면 관도대전의 향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왜 하필 그때 손책이 26세의 젊은 나이로 이름 없는 자객의 손에 죽어 북벌이 좌절됐는지 오로지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조조는 스스로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다. 조조는 항복한 원소의 무장 가운데에서도 장합과 고람을 부하로 만든다. 장합은 나중에 가정(街亭) 전투에서 촉한의 선봉장 마속(馬謖)을 격파해 제갈공명의 북벌 계획을 좌절시킨 바로 그 장수다.
이때 이미 조조는 먼 장래에 대비한 포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 포브스닷컴(심층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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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어제 있었더군요.  흉악범의 신분인 어디냐?를 놓고 왈가왈부하며 이제 와서 범인이 우울증이었다느니,폐쇄적인 아이였다느니, 중국계에서 한국계로 바뀌니까 급흥분하는 모습들이 참 보기 안 좋군요.  대선 쟁점의 이슈로 총기 소지 및 수정헌법 2조가 포함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옮겨 적느라 진땀 빼서 그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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