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C의 탄생배경과 각국의 오일공룡! :: 2007. 5. 6. 21:51

1. 석유의 이용
 인류가 석유를 이용한 정확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BC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스메르인들이 역청을 이용하여 조각가 초상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이라의 방부제로 쓰이는 등 주로 도장,약용,종교적 행사 등에 이용되었으며, 채유방법에 있어서도 지표에 분출되는 것을 이용한데 불과했습니다. 즉 석유가 성상 그대로 이용됨으로써 화학적,물리적 성질과 유용성에 대해 알지 못했고, 기술개발의 미숙으로 석유의 이용이 생산지 주변에 국한되거나 귀족 등의 특수용도로 사용되는데 그침으로써 석유산업이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근대 석유산업의 성립은 1859년 미국 펜실바니아주 오일크리크에서 에드윈 L 드레이크가 기계굴착방법으로 암반 밑 21미터까지 뚫어 하루 30배럴의 출유에 성공한 때로 보고 있습니다. 드레이크정의 성공을 계기로 석유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오하이오,텍사스 등 미국 각 주에서 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종래 석탄을 원료로 쓰던 정유공장들도 석유로 전환하고,신규정유공장이 속속 건립되었으며 클리블랜드,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뉴욕 및 산유지가 정유산업의 5대 밀집지역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들 정유공장에서는 저렴한 양질의 등유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시장수요를 충족시킴으로써 본격적인 '정유시대'를 가져왔습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1870년 록펠러가 클리블랜드에 오하이오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600B/D로 미국석유시장의 4%를 차지한 최대정유사 )를 설립하여 그로부터 1882년 스탠다드석유트러스트를 형성하기까지 10여년간 다른 정유사를 흡수, 합병하고, 수송부문과 저장시설을 독점함으로써 전미국시장점유율의 95%를 지배하여 근대석유산업 성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861년 석유수출이 시작된 이후 1880년대에는 세계적인 수요증가에 힘입어 미국의 석유수출량이 국내생산량의 60%( 이중 80%가 등유 )를 상회하여 1882년에는 수출량이 8백16만배럴로 전세계시장을 거의 독점하였으며, 1900년에는 3천1백40만배럴로 늘어납니다.

 한편 유럽에서는 미국 스탠다드사의 진출에 대항하여 1879년 노벨형제에 의해 러시아의 바쿠유전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석유회사를 설립하였고, 인도네시아에서는 1890년 로얄 더치석유사(주로 상류부문 전담)가 등장하여 석유산업의 국제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석유는 주로 등화용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등유의 용도가 난방용으로까지 확대되고, 과학의 발달과 산업에의 응용이 이루어져 가솔린 및 디젤기관의 실용화,선박용 연료의 중유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연료유 시대' 를 맞이하면서 1911년에는 휘발유소비가 등유를 웃도는 중요제품으로 등장했고, 석유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석유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여러 국제기구들이 등장했는데, 요즘 신문이나 텔레비젼 등을 통해 우리 귀에 익은 말 중의 하나인 OPEC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2. 세계 오일 메이저들의 대두.

메이저(국제석유자본)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는 스핀들톱의 유전발견과 중동지역 유전개발의 본격화를 들 수 있습니다. 1901년 미국 텍사스주 스핀들톱지역에서의 거대한 유전발견( 10만B/D )은 걸프와 텍사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텍사스 유전개발의 단서가 되었습니다. 동년 영국의 다이시는 페르시아왕국으로부터 60년간의 배타적인 조광권을 획득하고, 1906년 페르시아석유회사를 설립합니다. 페르시아석유회사는 1954년 이란의 석유국유화분쟁으로 BP( British Petroleum )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또한 동남아시아지역에서 성장하던 로얄티치사는 1907년 수송 및 판매부문을 전담하던 셸운수무역회사와 통합, 로얄 더치 셸을 발족시키고 베네수엘라,멕시코 등으로 적극 진출하여 메이저형성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한편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내 최대 석유기업인 스탠다드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1911년 반트러스트법에 의해 34개사로 분할되었는데, 이때 뉴저지 스탠다드, 소코니, 캘리포니아 스탠다드 등 수 개 사가 현재의 엑슨,모빌 등으로 발전했습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대전은 석유산업에 중대한 전환기가 됩니다. 석유의 중요성을 동감한 각국은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제1차 대전 이전에 터키제국의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은 터키의 패전으로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고,국명을 이라크로 바꾸게 됩니다. 이에 따라 터키가 이 지역에서 갖고있던 석유이권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1920년 영국과 프랑스는 산레모협정을 체결하여 제3국의 진출을 봉쇄합니다. 이 협정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대해 프랑스령인 시리아 내에 파이프라인이 통과하는 것을 승인하는 대가로 독일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터키석유주식회사의 주식 25%를 영국으로부터 이양받습니다. 이와 같은 영국과 프랑스의 일방적 결정에 분개한 영국의 석유회사들은 정부에 대항하여 제1차 대전 중 미국의 공헌을 내세워 중동석유이권의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요구하고 터키석유회사에의 참여를 꾀합니다. 이권교섭은 상당히 난항을 거듭하였으나,결국 1928년 미국계 석유회사들의 경영참여의 문이 열립니다. 그 결과 터키석유회사( 1929년 '이라크로 석유회사'로 개칭 )의 지분율은 앵글로 페르시아( 훗날 BP ) 23.75%, 로얄 더치 셸 23.75%, 프랑스재단( CFP )23.75%, 미국재단 23.75%, 그루벤칸 5.00%로 결정하는 내용의 적선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은 또한 차후 터키석유회사의 경영에 참가하는 기업은 서터키영내에서 단독으로 자유행동하는 것을 금지하고,새로운 석유이권의 취득이나 석유개발사업은 반드시 전회원 공동으로 시행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발 수 개사가 중동석유이권의 독점을 획책했던 이 협정은 이라크 석유에 참여하지 못한 미국의 다른 석유회사들이 중동으로 진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 석유 자원의 획득과 원유시장의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격렬한 시장쟁탈전 속에서 국제적 기업규모에 달했던 몇 개 회사들 사이에 점차 협조기운이 일기 시작, 적선협정이 체결된 후 2개월이 지난 1928년 9월 앵글로 페르시아, 로얄더치 셸, 뉴저지 스탠다드의 3개사는 스코트랜드의 어크나카리에서 회합을 갖고, 세계원유의 생산과잉을 억제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합니다. 이것을 어크나카리협정이라고 부르는데 후에 이것이 메이저에 의한 국제석유카르텔의 효시가 되어 세계석유산업 독과점체제의 틀을 마련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국제적 기업규모에 달한 회사는 일반적으로 메이저는 7자매라고 부르는 미국계의 Exxon, Texaco, Chevron( Gulf와 Socal통합 ), 영국계의 BP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로얄더치 셸을 가리키며, 여기에 프랑스의 CFP를 추가하여 8개사로 보기도 합니다. 메이저는 1920년대 이래 세계석유산업을 지배하여 제1차 석유위기가 발발한 1973년 자유세계 원유공급량의 64.4%, 원유처리량의 50.9%, 제품판매량의 60.8%를 차지했으나, 1979년 제2차 석유위기 이후에는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고 대신 석탄, 원자력, 석유화학 등 다른 부문에 진출하여 종합에너지산업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및 일본의 전후복구등으로 석유수요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나, 낮은 생산비를 무기로 한 중동원유의 생산증가로 1950년대 후반에는 공급과잉이 나타나 메이저는 시장점유율 확보를 위해 원유가격을 인하시키는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그 결과 이권료, 조세등에 의존하는 산유국으로서는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1953년경부터 국제석유시장은 공급과잉으로 구매자시장의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1948년 베네수엘라가 채택한 이윤분할제의 도입으로 중동내의 산유국들은 메이저에 대하여 이권협정의 시정을 원하게 됩니다.

 중동의 원유생산을 담당하고 있던 국제석유회사들이 중동원유의 매매경쟁에 대처하기 위하여 1959년 2월 일제히 원유의 공시가격의 인하로 말미암아 국가세입이 거의 대부분을 석유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중동산유국들로서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은 1959년 3월 국내석유산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값싼 중동석유에 대하여 수입제한조치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아랍연맹은 1945년 창설이래 석유에 관한 연맹체의 설립구상을 해 왔습니다. 1960년 4월 카이로에서 제1차 아랍석유회의를 개최하였으며, 동회의에서 산유국들은 '석유회사는 원유의 공시가격을 변동할 때에는 사전에 산유국의 의향을 청취하여야 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국제석유회사들은 이 결의를 무시하고 1960년 8월 재차 일련의 공시가격의 인하를 발표합니다. 이 8월의 공시가격 인하조치는 산유국을 크게 자극하였으며 1960년 9월에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란, 이라크, 베네수엘라 등 5대 산유국의 각료회의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5개국회의에서 산유국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항구적인 기구의 설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는데 이것이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OPEC)입니다. 처음 5개국이었던 OPEC는 결성 다음해인 1961년에 카타르,1962년에 인도네시아와 리비아가 가입함에 따라 8개국으로 늘어났으며 그후 1967년 아부다비, 1969년에 알제리아, 1971에 나이지리아, 1973년에 에콰도르가 가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1975년에 가봉이 가입함으로써 현재 13개국의 가맹국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OPEC의 본부는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고,조직은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와 이사회, 사무총장, 사무국, 경제위원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OPEC의 활동은 원유가 과잉생산되었던 1960년대에는 보잘것 없었으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OPEC의 단결이 더욱 강화되어 드디어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 석유를 무기화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아랍세력을 제압하는 한편, 메이저로부터 석유지배권을 빼앗게 됩니다. 이때의 세계적인 정치, 경제적인 혼란을 '제1차 석유위기'라고 합니다.  1970년대의 석유가격 동향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톱니이론이 주장되고 있는데 현물가격이 상승하면 OPEC 각 회원국은 더 높은 계약가격을 실험적으로 설정했고 그러면 새로운 책정가격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OPEC회원국들이 어떠한 가격수준을 통용될 수 있는 가격으로서 설정하느냐의 여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와 대별되는 시장합리성이론은 현물가격과 책정가격과의 상관성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이 견해는 제1,2차 석유파동과는 관계없이 사전에 예견되었던 산유량이 격감한데 따른 직접적인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OPEC는 독점의 경우와는 달리 이론으로서 설명하기 어려은 점이 많으나 OPEC회원국들의 의도처럼 완전한 형태의 카르텔로 가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각 회원국의 생산량과 가격을 중앙기구가 결정.
즉 중앙기구는 원유의 시장수요곡선을 측정합니다.이 시장수요곡선으로부터 한계수입곡선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총이익을 극대화시킬 것이며 그 이익은 합의된 방식에 의하여 각 회원국에 분할됩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이론은 각국의 독자적 행동이나 국제정치적인 외부 요인이 크므로 실제적으로는 사용되기 어렵습니다.


 초기의 OPEC는 회원국들간의 공통적인 정책수행을 위한 정보내지는 조사활동을 수행하는데 지나지 않았으나 1973년의 석유파동 당시에는 강력한 수출카르텔로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수출카르텔은 원칙적으로 가격에 대하여 확고한 의견일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동시에 생산통제, 시장분배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의견일치가 있어야 하나, 그들의 수출에 대한 의견합의는 임의적이며 보상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OPEC회원국들이 인정하는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하여 가격을 책정하고 변경시키는 결정을 각 회원국정부의 자유재량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974년 이후의 OPEC는 불완전한 가격카르텔이라고 정의하는 편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1979년 가격단일체제가 붕괴되고 산유국들이 생산, 정제, 판매의 모든 부문을 장악함으로써 사전합의 없이 임의로 가격을 상승기키면서 OPEC는 강한 결속을 가지게 됩니다. 최근 세계에너지 수요구조의 변화를 보면 석유의 비중이 점차 감소하고,석탄, 천연가스, 원자력 등 대체에너지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70년대 석유위기 이전에 석유는 가격상의 이점과 용도의 다양성으로 타에너지원에 비해 높은 소비증가율을 나타냈으나, 1973년 제1차 석유위기의 결과로 소비증가율이 둔화되기 시작하여 1979년 제2차 석유위기 이후에는 소비가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반면에 OPEC는 막대한 이윤을 획득했습니다.

 석유소비국들은 이러한 유가인상의 타격을 받게 되자 석유소비를 최대한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비OPEC지역에서의 신규유전개발을 촉진하고 채산성을 갖게 된 멕시코, 북해유전등에서 원유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부터 비OPEC산유국들의 산유량이 계속 늘어났으며, 석유수요감소기인 1980년 이후에도 생산량은 크게 증대되었습니다. 공산권의 순수출을 포함한 비OPEC의 석유공급은 1979년 2천2백10만B/D에서 1984년에는 2천7백50만B/D로 늘어납니다. 비OPEC의 산유량증대나 석유수요의 감소는 결국 OPEC의 생산량감소를 가져와 OPEC의 공급량은 1979년의 3천백60만B/D에서 1984년에는 1천8백50만B/D로 감소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OPEC의 시장접유율 감소는 카르텔기능의 약화를 가져 옵니다. 단기적으로는 OPEC의 공급량이 크게 늘지 못합니다. OPEC산유국들은 자국의 석유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생산쿼터 이상의 원유를 생산하거나 공식가격 이하의 할인판매를 실시하고 있으며, 또한 생산쿼터나 공식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바터거래를 늘리고 있습니다. 이런 카르텔기능을 약화시키는 OPEC의 내부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국가가 유휴생산능력을 갖고 있으며,OPEC회원국의 심각한 재정난에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현물시장은 한때 단기적인 수급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필요악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으나, 최근 현물시장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현물시장은 국제석유시장의 가격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석유가격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OPEC는 현물시장동향에 따라 그들의 정책효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현물시장과 무관하게 행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공식가격이든 현물가격이든 세계원유가력의 지표는 아라비안라이트였지만, 원유의 공급패턴이 바뀜에 따라 아라비안라이트,이라니안라이트, 보니라이트 등 OPEC산 원유는 기준유로서의 위치가 약화됩니다.





3. OPEC의 향후 전망.

 최근 수 년동안 국제석유시장에서 차지하는 OPEC의 비중이 앞에서 말한 비OPEC산유국의 산유량 증대와 OPEC의 결속력 약화,현물시장기능의 확대등의 요인으로 크게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OPEC는 국제석유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OPEC산유국은 지난 1970년대초 부터 공업화의 일환으로서 자국지원의 효율적 활용과 부가가치 재고를 위해 석유정제, 석유화학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왔으며, 최근에 이르러 이들 프로젝트의 일부가 이미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하류부문진출의 대표적인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로서 사우디는 내수용이 아닌 수출용 정유공장건설을 추진하여 가동,건설중입니다. 또한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리비아도 진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규정제시설의 증가로 OPEC산유국의 정제능력은 늘어날 전망이며, 산유국의 하류부문진출은 연료비나 원료비 등이 선진국에 비해 저렴하여 생산비용상의 이점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석유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 됩니다. 산유국의 신규정제시설은 상당히 고도화된 시설로서 수출제품은 중간유분이나 휘발유의 수출이 증가될 것이므로 현재의 석유제품 수출패턴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4.  각 국 오일 메이저 기업 현황.

메이저 기업은 7자매라고 불리는 미국계의 Exxon, Texaco, Chevron( Gulf와 Socal통합 ),영국계의 BP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로얄더치 셸을 가리키며, 여기에 프랑스의 CFP를 추가하여 8개사로 보기도 합니다.

엑슨 ( Exxon Corporation )
미국의 석유화학회사.
설립자 : 존 D. 록펠러
설립일 : 1882년
본사 : 텍사스주 어빙
총자산 : 1445억 21백만 달러(1999)
매출액 : 1638억 81백만 달러(1999)

 1882년 J.D.록펠러가 뉴저지에 설립한 스탠더드오일의 후신. 1888년 앵글로아메리카오일을 설립하였으며, 1898년 캐나다의 임페리얼오일의 지배권을 획득. 1911년 트러스트 해체에 따라 34개 회사로 분리되어, 엑슨은 동부 해안의 정유소와 해외활동만 하게 됨. 원유개발생산에서 정유 ·수송 ·판매 및 관련 화학제품의 제조에 이르는 종합석유회사로 세계 80여 개국에 약 70개소의 정유소를 두고 있다. 1999년 세계 4위 규모의 석유회사인 모빌(Mobil)을 흡수합병하여 엑슨모빌(ExxonMobil Corporation)로 사명을 변경, 세계 최대 석유회사의 위치를 확고히 함.

텍사코 ( Texaco Inc. )
미국의 석유 ·석유화학 회사.
설립자 : 조 컬리넌, 아널드 쉴래트
설립일 : 1902년
본사 : 뉴욕주 화이트플레인스
총자산 : 289억 72백만 달러(1999)
매출액 : 356억 90백만 달러(1999)

  1902년 텍사스(The Texas Company)로 출발, 1959년 이름을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 20세기 후반 세계 최대의 석유 판매회사의 하나로 꼽히는 텍사코는 당초 사업지역을 텍사스주(州)로 한정하였으나, 미국 전역은 물론 전세계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1911년 스핀들톱 유전에서 석유를 생산하게 되자 일리노이주에 정제소를 설립, 처음으로 텍사스 밖으로 진출하였고, 1928년에는 국내 48개주 전지역에 석유를 파는 최초의 회사가 되었다. 1930년대에는 해외로 진출, 콜롬비아 ·캐나다 ·베네수엘라 등지로 영업범위를 넓혀갔으며, 1936년에는 캘리포니아스탠더드석유회사와 공동으로 중동 등 동반구에 공동판매회사를, 또 칼텍스 계열사와 아람코(ARAMCO : 아라비안-아메리칸석유회사) 등의 지주회사를 설립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미국 메이저’의 원유조달원의 미국 회귀가 진전됨에 따라 텍사코도 국내 유전확보에 들어가, 1984년 유력한 독립 석유회사인 게티오일(Getty Oil Co.)을 매입하였다. 한국에서는 LG칼텍스정유(주)를 통하여 판매활동을 벌이고 있다. 본사는 뉴욕주(州) 화이트플레인스에 있다.

셰브런 ( Chevron Corporation )
미국의 국제석유기업.
설립일 : 1879년
본사 :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총자산 : 406억 68백만 달러(1999)
매출액 : 326억 76백만 달러(1999)

  1879년 ‘퍼시픽코스트석유’로 출발, 캘리포니아에서 석유 생산과 정제를 주로 하는 업체로 성장해 오다가, 1900년 스탠더드석유에 인수되어 스탠더드그룹 산하의 회사가 되었다. 1906년 스탠더드 계열인 웨스트코스트판매회사와 합병하면서 상호를 캘리포니아스탠더드석유로 개칭하였으며, 1911년 뉴저지에 있는 스탠더드 석유연합이 미국 대법원에 의해 분할 해체되자, 이 회사는 유전 · 정체시설 · 저장탱크 · 송유관(피이프라인) 등을 갖춘 막강한 독립회사로 재출발하였다. 1926년 퍼시픽석유의 소유권을 획득, 송유관과 정제시설을 텍사스까지 확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 초반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막대한 양의 석유 발굴, 1936년 캘리포니아아라비안텍사코와 합자, 칼텍스석유(Caltex Petroleum Corp.)를 설립함으로써 동반구(東半球)에서의 석유공동판매회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 · 캐나다 · 리비아 · 나이지리아 · 에스파냐 · 아시아지역 등지에 자회사와 계열사를 설립, 판매망을 넓혀 갔으며, 1961년에는 켄터키주에 있는 스탠더드석유를 합병하고 1984년에는 걸프석유(Gulf Oil Corp.)를 인수함으로써 ‘캘리포니아스탠더드석유’시대를 마감하고, 현재의 셰브런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셰브런은 미국 본토에서의 공급원을 확충함은 물론, 세계 90여 개국에 판매망을 두고 있으며, 석유탐사· 판매 · 기술개발 · 아스팔트 생산 등 석유사업의 모든 분야에 참여하고 있다. 본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BP 아모코 ( BP Amoco )
영국의 석유회사.
설립자 : 윌리엄 K. 다시
설립일 : 1921년
본사 : 런던
총자산 : 895억 6100만 달러(1999)
매출액 : 835억 6600만 달러(1999)

 1909년 앵글로-페르시아석유회사로 설립되었다가, 1932년 이란이 이 회사의 기본권리를 취소한 후인 1935년 앵글로-이란석유회사로 개칭하였다. 이란 석유분쟁 후인 1954년 브리티시석유유한회사가 되었다가, 1982년 상호를 BP(영국국영석유회사 : The British Petroleum Co., PLC)로 변경하였다. 그 후 이란·쿠웨이트 등 중동 각국의 유전 국유화의 움직임에 따라 원유매입량을 증대시키고 있으며, 1966년부터 북해유전을 개발하고 있다. 본사는 영국 런던에 있다. 1999년 미국의 아모코를 흡수 합병하여 BP아모코로 회사명을 변경함으로써 세계 3대 석유회사로 발돋움하였다. 또한, 2000년 2월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시설을 보유한 ARCO(아코)를 흡수 합병함으로써 엑슨-모빌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민간 석유회사가 되었다.


로열더치셸그룹 ( Royal Dutch-Shell Group )
네덜란드와 영국의 합작 정유회사.
설립일 : 1890년
본사 : 네덜란드 헤이그
총자산 : 1138억 83백만 달러(1999)
매출액 : 1053억 66백만 달러(1999)

 영국 및 네덜란드에 본거지를 두고 세계에 지배망을 펴고 있는 국제적 대석유업 트러스트이다. 1890년 네덜란드령(領) 동인도의 유전 개발을 위하여 네덜란드에 로열더치석유회사가 설립되었다. 1897년 영국의 새뮤얼상회가 보르네오의 유전을 획득하여 셸무역운송회사를 설립하였다. 1903년 이 2개 회사는 당시 러시아의 유전을 개발하고 있던 파리의 로트실트가(家)와 공동 판매회사로서 아시아석유회사를 설립하였다. 1907년 자산을 합동하여 수송 ·판매를 위한 앵글로색슨석유회사를 영국에, 채유 ·정제(精製)를 위한 바타비아석유회사를 네덜란드에 설립하고, 지주회사(持株會社)가 됨으로써 로열더치셸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 후 W.A.디터딩의 통솔 아래 네덜란드령 동인도 및 보르네오의 석유를 생산 ·수송 ·판매 분야에서 독점하고, 러시아 ·루마니아 ·멕시코 ·미국 ·베네수엘라 등에서도 석유 이권을 획득, 스탠더드계(系)의 석유회사에 대항하면서 발전하였다. 현재 이 그룹은 순수한 지주회사인 네덜란드의 로열더치석유회사(N.V.Koninklijke Nederlandsche Petroleum Maatschappij)와 영국의 셸운송무역회사(Shell Transport and Trading Co.Ltd.)를 정점으로 실제 경영을 담당하는 모기업(母企業)인 네덜란드의 바타비아석유회사(N.V.De Bataafsche Petroleum Maatschappij)와 영국의 셸석유회사(Shell Petroleum Co.Ltd.)를 통해 세계 100개국 이상의 각국에서 석유 ·화학 산업의 각 분야에 관여하는 약 500개 회사의 전부 또는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



● 석유의 이해
● 석유의 이모저모
● 석유의 기초지식
 - 대한석유협회

● 석유수출국기구의 발전과정과 장래
 - 김중관(성균관대 무역대학원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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